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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 Downey, J. (2008). Recognition and the renewal of ideology critique. In D. Hesmondhalgh & J. Toynbee (Eds.). The Media and Social Theory  (pp. 59~74). New York: Routledge. 인정과 이데올로기 비판의 부활 John Downey  코너(John Corner)이데올로기 개념에 대한 부고(訃告, obituary)에서 우리는 념의 죽음을 너무 슬퍼하지 말고 나아가기 시작하자고 주장했는데, 이러한 주장은 미성숙하다 (2001: 525-33). 우울하게 보일 위험을 무릅쓰고, 나는 개념의 회복(revival)일반적인 해방(emancipation)미래, 그리고 정치적으로 관련된 학문의 비판적 분야로서 미디어 연구 미래에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1970년대와 1980년대에 개념의 편재성(ubiquity)과는 조적으로, 최근의 미디어 연구에서 그것의 놀랄만한 부재는 계몽 프로젝트의 이론적・실천적 고갈이라는 불안하게 널리 퍼진 가정과 현재 미디어 연구의 매우 불운한 협소함(자체는 한편으로는 미디어 연구 분야의 전문화를 향한 바람직한 드라이브의 결과)이라는 증상을 보인다. 그러나 어떤 경우이든 설득력 있는 근거가 없다. 사실은 반대가 맞다. 지속적이 실제로 증폭되고 있는 지역적인 차원과 글로벌 차원의 경제・사회・정치적 불평등은 새로 비판적 삶의 생명력을 미디어 연구에 불어넣는 것이 윤리적으로 긴요함을 의미한다. 미디 제도는 인간의 번영을 가로막는 경제 시스템의 일부일 뿐만 아니라, 종종 그러한 상태가 필연적이거나 사실상 바람직하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실망스러운 정치 상황이 비판적인 지성 관여 외면을 승인해주는 것은 아니다. 더욱이 이러한 기획을 위해 이용할 있는 지적 천은 미디어를 연구하는 학자들에 의해 다뤄지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  코너는 이데올로기 개념의 쇠락이 보다 넓은 원에서 서구 맑스주의의 쇠락을 가리킨다고 주장하지만, 몰락은 개념이 발전되어 방식의 내재적인 문제점 때문이라고도 주장한 . 이는 1990년대에 이데올로기 개념을 부활시키려는 가지 시도에서 명백하다 그들은 B. 톰슨(John B. Thompson 1990), 테리 이글턴(Terry Eagleton 1991), 그리고 이크(Teun van Dijk 1998). 코너의 이글턴과 다이크에 대한 비판이 온당한 반면 (여기 에서는 논의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톰슨에 대해서는 정당하게 비판하지 못했는데, 톰슨은 중에서 가장 비판하기 어려운 대상이다. 톰슨의 작업은 대체로 미디어 연구에서 간과되어왔는 , 이는 발전시켜 개념의 내적 문제와 관련이 있다기보다 (비록 다소의 문제는 있지만) 디어 연구와 프랑크푸르트학파에 속하거나 영향을 받았고 비판이론(Critical Theory)3세대 라고도 부르는 악셀 호네트(Axel Honneth)낸시 프레이저(Nancy Fraser)같은 젊은 판이론가들 사이의 부당한 단절에 관련이 있다. (혹자는 보다 넓은 차원에서 미디어 연구와 많은 고전적・현대적 사회이론 사회학 사이의 단절이 존재한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미디 연구는 한동안, 다소 투박하게나마, 1세대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작업에 크게 의존했는데, 1 세대 프랑크푸르트학파는 문화적 포퓰리즘의 희생양이었고, 2세대 후속 세대를 안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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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

Downey, J. (2008). Recognition and the renewal of ideology critique.

In D. Hesmondhalgh & J. Toynbee (Eds.). The Media and Social Theory   (pp. 59~74).

New York: Routledge.

인정과 이데올로기 비판의 부활

John Downey

  존 코너(John Corner)는 이데올로기 개념에 대한 부고(訃告, obituary)에서 우리는 그 개

념의 죽음을 너무 슬퍼하지 말고 나아가기 시작하자고 주장했는데, 이러한 주장은 미성숙하다(2001: 525-33). 우울하게 보일 위험을 무릅쓰고, 나는 그 개념의 회복(revival)이 일반적인

해방(emancipation)의 미래, 그리고 정치적으로 관련된 학문의 비판적 분야로서 미디어 연구

의 미래에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1970년대와 1980년대에 그 개념의 편재성(ubiquity)과는 대

조적으로, 최근의 미디어 연구에서 그것의 놀랄만한 부재는 계몽 프로젝트의 이론적・실천적

고갈이라는 불안하게 널리 퍼진 가정과 현재 미디어 연구의 매우 불운한 협소함(이 자체는 다

른 한편으로는 미디어 연구 분야의 전문화를 향한 바람직한 드라이브의 결과)이라는 증상을

보인다. 그러나 그 어떤 경우이든 설득력 있는 근거가 없다. 사실은 그 반대가 맞다. 지속적이

며 실제로 증폭되고 있는 지역적인 차원과 글로벌 차원의 경제・사회・정치적 불평등은 새로

운 비판적 삶의 생명력을 미디어 연구에 불어넣는 것이 윤리적으로 긴요함을 의미한다. 미디어 제도는 인간의 번영을 가로막는 경제 시스템의 일부일 뿐만 아니라, 종종 그러한 상태가

필연적이거나 사실상 바람직하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실망스러운 정치 상황이 비판적인 지성

의 관여 외면을 승인해주는 것은 아니다. 더욱이 이러한 기획을 위해 이용할 수 있는 지적 원

천은 미디어를 연구하는 학자들에 의해 다뤄지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

  코너는 이데올로기 개념의 쇠락이 보다 넓은 차원에서 서구 맑스주의의 쇠락을 가리킨다고

주장하지만, 그 몰락은 그 개념이 발전되어 온 방식의 내재적인 문제점 때문이라고도 주장한

다. 이는 1990년대에 이데올로기 개념을 부활시키려는 세 가지 시도에서 명백하다 — 그들은

존 B. 톰슨(John B. Thompson 1990), 테리 이글턴(Terry Eagleton 1991), 그리고 턴 반 다

이크(Teun van Dijk 1998)다. 코너의 이글턴과 반 다이크에 대한 비판이 온당한 반면 (여기

에서는 논의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톰슨에 대해서는 정당하게 비판하지 못했는데, 톰슨은 셋

중에서 가장 비판하기 어려운 대상이다. 톰슨의 작업은 대체로 미디어 연구에서 간과되어왔는

데, 이는 발전시켜 온 개념의 내적 문제와 관련이 있다기보다 (비록 다소의 문제는 있지만) 미

디어 연구와 프랑크푸르트학파에 속하거나 영향을 받았고 비판이론(Critical Theory)의 3세대

라고도 부르는 악셀 호네트(Axel Honneth)와 낸시 프레이저(Nancy Fraser)와 같은 젊은 비

판이론가들 사이의 부당한 단절에 관련이 있다. (혹자는 보다 넓은 차원에서 미디어 연구와

많은 고전적・현대적 사회이론 및 사회학 사이의 단절이 존재한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미디

어 연구는 한동안, 다소 투박하게나마, 1세대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작업에 크게 의존했는데, 1

세대 프랑크푸르트학파는 문화적 포퓰리즘의 희생양이었고, 2세대 및 후속 세대를 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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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일부 칭찬할만한 예외를 제외하고는 공론장에 관한 하버마스 초기 작업으로 시작하여 끝난

다는 점을 생각하는 것으로 용서받을 수 있었다 (Habermas 1989). 그러나 이러한 단절에 대

한 모든 비난이 미디어 연구에만 향해져서는 안 된다. 비판이론 내부에서도 미디어와 문화 비

판으로부터 법・도덕철학, 정치이론, 비판이론가 스스로의 작업에 대한 논평 등으로 방향 수정이 있었다. 필요한 것은 미디어 연구와 프랑크푸르트학파 사이의 친분을 회복하는 것이다.

톰슨의 이데올로기 개념 자체가 약간의 수정이 필요하지만, 그것은 이데올로기 비판을 향한

개념적 움직임을 분명히 보여주기에, 경험적 연구에서 보다 널리 받아들여져야 하며 따라서

그 친분을 회복하기 시작할 좋은 장소다.

  코너의 톰슨에 대한 주요 지적은 톰슨이 아마도 자신이 하고 있는 것을 인식하지도 못한 채

로 미디어 연구의 기존 문헌을 단지 반복하고 있으며 (예를 들어, 미디어 텍스트에 대한 수용

자 반응을 ‘해독’(reading off)하는 문제에 관해서), 따라서 전혀 새롭지 않고, 톰슨이 미디어

연구에 대해 별로 할 이야기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톰슨이 미디어 연구 문헌에 대한 조예가깊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이는 다른 사회이론가들, 예를 들어, 마뉴엘 카스텔

스(Manuel Castells)와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 등도 공유하고 있는 반갑지 않은

무지다). 그러나 톰슨 작업의 가치는 이데올로기 개념의 독창적인 응용에 있다기보다는 이론

의 명료한 계발, 특히 체계적인 계발에 있다. (그러나 혹자는 이 점이 사회이론과 미디어 분석

사이의 학문적 노동의 합리적인 분업을 보여준다고 할 수도 있겠다.) 코너는 톰슨의 이데올로

기적 장치에 대한 유형론(typology)이 ‘이 주제에 관한 모든 사유를 연상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충분히 파악하지 못하기에 ‘그다지 새롭지 못한’ 판단에 도달한다 (2001:528).

  코너는 톰슨의 개념의 내적 문제를 언급하지 않는다. 약간의 문제가 있지만, 기본적으로 ‘문

제’는 그의 개념이 거의 채택되거나 적용되지 않았다는 데 있다. 이는 넓은 맥락의 서구 맑스

주의의 쇠락뿐만 아니라 미디어 연구의 내적 문제와 관련이 있다. 미디어 연구의 내적 문제는

학제로서 미디어 연구의 성장(예를 들어, 고전 및 현대 사회이론에 대한 관여의 결핍)과 윤리

학, 인식론, 정치적 실천의 문제에 관한 매우 뿌리 깊은 불확실성 및 혼돈과 관련이 있는 그

협소함이라고 할 수 있다. 아래에서 나는 먼저 내가 톰슨의 수수하지만 의미심장한 개념적 진

전으로 간주하는 것의 개요를 밝히고, 다음으로 그의 작업과 관련된 세 가지 문제 영역을 논

의한 다음에 다음과 같은 제목으로 어떻게 그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는가를 제안할 것이다: 윤

리학, 설명, 그리고 정치적 실천. 톰슨의 이론을 수정하기 위하여, 아는 악셀 호네트와 낸시

프레이저의 작업에 의존할 것이다.

톰슨의 진전

  톰슨은 이데올로기의 경멸하는 개념(pejorative concept)을 방어한다는 점에서 최근의 사회

학에서 유별나다. 이데올로기를 연구한다는 것은 ‘의미가 지배 관계를 정립하고 유지하는 데

쓰이는 방법을 연구한다는 것’이다 (1990:56). 따라서 톰슨은 윤리적・인식론적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지배는 ‘나쁘고’, 그 지배를 정립하거나 유지하는데 복무하는 상징적 형식들도

‘나쁘다’. 톰슨에 따르면, 우리는 이데올로기의 작동과 그것이 어떻게 지배관계와 연결되어 있

는가를 밝힐 수 있다. 즉 우리는 사회 세계에 관해 진실한 무엇인가를 말할 수 있다. 비록 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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슨이 이데올로기 비판의 ‘인식론적 부담’을 덜고자 원했으나, 그가 이러한 노력에서 성공했는

가는 분명치 않다 (1990:56). 예를 들어, 변할 수 있는 것을 고정된 것으로 표상한다는 의미의

물화(reification) 개념을 살펴보자. 물화를 인식하려면, 먼저 변할 수 있는 것을 인식할 수 있

어야 한다. 경멸하는 이데올로기 개념을 사용하려면, 그 비판을 뒷받침하는 진리(truth)와 올바름(good)에 관한 굳건한 이론이 필요하다.

  그러한 윤리적・인식론적 주장을 피하려는 인문・사회과학의 경향은 이데올로기 개념의 종

말을 설명하는 방향으로 오랜 길을 걸어왔다. 그 어떤 경멸적인 이데올로기 개념도 이러한 윤

리적・인식론적 주장들을 입증해야 한다. 나는 이 문제를 잠시 젖혀두고, 이데올로기 작동의

여러 모드를 범주화하는 체계적인 방식에 관한 톰슨의 진전을 개략적으로 소개할 것이다.

  이 일반적인 모드와 전략은 그 자체로 이데올로기적이지 않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유의 모드로서 ‘정당화’(legitimation)는 이데올로기적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그것은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어떤 시도가 행해질 때 이데올로기가 된다 (<표 4-1>). 이

제 이 전략들의 현존에 관해서는 새로운 것이나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 아무 것도 없다. 그것

들은 기호학, 언어학, 담론분석, 비판적 담론분석 등 다양한 작업에서 흔히 논의된다. 그것들

은 표준적인 개념적 도구에 속한다. 그것들은 미디어 분석의 가장 기본이나, 보다 넓은 윤리

적・설명적・정치적 관심으로부터 단절되었다.

일반적인 모드 상징적 구성의 몇 가지 전형적인 전략

정당화(Legitimation)

합리화(Rationalisation)보편화(Universalisation)서사화(Narrativisation)

위장(Dissimulation)

대체(Displacement)완곡화(Euphemisation)비유(Trope)

단일화(Unification)

표준화(Standardisation)통합의 상징화(Symbolisation of unity)

분절화(Fragmentation)

차별화(Differentiation)타자의 삭제(Expurgation of the other)

물화(Reification)

자연화(Naturalisation)외부화(Eternalisation)규범화/수동태화(Nominalisation/passivisation)

<표 4-1> 톰슨의 이데올로기 작동 모드 (1990:60)

  톰슨의 작업에서 새로운 것은 어떻게 이들 여러 전략이 함께 들어맞으며 이데올로기의 비판

적 개념에 체계적으로 연관될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는 점이다. 이들 개념을 적용하는 것은 특

별히 어렵지 않다. 톰슨의 개념이 경험적 작업을 통해서, 이데올로기 비판 그 자체를 통해서

받아들여져 발전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의 작업의 이런 측면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이는 그

의 작업이 읽혀지지 않았고/않았거나 그가 제안해야 하는 윤리적・인식론적 주장이 오늘날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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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으로 받아들이기 쉽지 않기 때문에 공감을 얻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필요한 것은 다

음과 같다: 첫째, 분석의 언어와 ‘좋은 삶’(good life)이라는 아이디어와의 재접속

(reconnection); 그리고 둘째, 상징의 분석과 재생산을 돕는 경제적・정치적 실천과의 재접

속.

윤리학: 참여에서 인정으로

  비판의 정당화(justification)는 오늘날 비판 사회과학의 핵심 문제다. 왜 지배가 ‘나쁜가’?

보다 나은 곳이나 ‘좋은 삶’에 대한 아이디어가 없다면, 비판 개념은 무의미해진다. 톰슨이 하

버마스의 미성숙한 이데올로기 개념 폐기를 비판하고 이데올로기 개념의 재작업에서 맑스의

지배 개념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하지만, 톰슨이 상정하고 있는 비판의 정당화는 암시적으로

(implicitly ) 하버마스의 담론윤리학에 토대를 두고 있다. 톰슨은 왜 지배가 ‘나쁜가’에 대해이유를 제공하지 않으나 (그리고 이는 문제가 있는 부재(absence)다), 어떻게 해석이 정당화

되는가에 관해 톰슨이 서술한 방식을 고려하는 것에서 우리는 이러한 작업을 할 수 있다:

해석이 정당화될 수 있다고 가정하면서, 우리는 강요함(being imposed )으로써 정당화 될 수

없음을 전제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해석을 정당화하는 것과 그것을 타자에게 강요하거나

우리 스스로에게 강요하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음을 전제한다. 정당화하는 것은 이유, 근거,

증거, 해명을 제공하는 것이다; 강요하는 것은 주장하거나 재주장하는 것, 타자에게 수용을 강

제하는 것, 질문이나 이견을 침묵시키는 것이다. 정당화하는 것은 타자를 납득시킬 수 있는 개

인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강요하는 것은 타자를 복종해야 하는 개인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이

차이는 해석이란 강요되지 않을 때에만 정당화될 수 있음을, 다시 말해서, 비대칭적인 권력 관

계의 유예(suspension)를 포함하는 조건 아래에서만 정당화될 수 있음을 제시한다. 나는 이를

‘비강요(non-imposition )의 원칙이라고 부를 것이다.

(1990:321)

  톰슨은 비강요와 함께 (자기성찰(self-reflection)과 비배제(non-exclusion)와 같은) 다른

원칙들의 개요를 계속해서 설명한다.

  이는 하버마스의 언어의 보편적인 전제(universal presuppositions)에 대한 설명과 똑같지

는 않지만, 분명히 유사하다. 토론에 들어간다는 것은 대화에서 개인을 평등한 참여자이자 대화의 결과를 결정하는 동등한 권력을 지닌 것으로 인정하는 것을 동반하는 정당화의 가능성을

전제하는 것이다. 따라서 지배에 대한 비판은 궁극적으로 언어의 특성에 토대를 둔다.

  이러한 신칸트주의(neo-Kantian) 담론윤리는 이데올로기 비판을 정당화하기 위해 가능한

방법의 하나다. 어떤 측면에서, 이는 낸시 프레이저의 하버마스주의적인 ‘참여적 동

등’(participatory parity)의 정당화와 매우 흡사하다. 비판의 토대를 정초하려는 이러한 시도

에 대한 불만족이 지적 기획으로서 비판이론의 쇠락을 설명한다는 것은 의문의 여지없이 사실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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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신칸트주의 접근법에 대한 불만족은 3세대 비판이론 내부에서도 찾아볼 수 있으며,

악셀 호네트의 작업에서 가장 분명하게 천명되었다 (비록 앵글로 아메리칸 사회이론 내에서는

호네트를 하버마스의 추종자로 보는 경향이 있지만). 호네트는 레퍼런스(reference)를 통해 비

판을 정당화하려는 시도에서 담론윤리학과 재작업된 헤겔주의 인정 개념(Hegelian conceptof recognition)에 토대를 둔 비판의 정당화를 향해 나아간다. 이는 전체적인 비판이론에게뿐

만 아니라 이데올로기 비판 개념에서도 탐구의 중요한 새로운 길인데, 우리로 하여금 그러한

비판을 재개념화 하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호네트는, 헤겔의 초기 작업에 근거하여, 인정이 개인의 자아실현과 인류의 번영에 필수적

이라고 주장한다. 개인은 타자에 의해 주체로서 인정되어짐에 의해서 스스로를 주체로 인식한

다.

개인은 일반화된 상호작용의 파트너에 의해서 반응의 승인 패턴을 통해서 자신의 개성을 구성하는 특정한 능력과 필요를 확인함으로써 사회 공동체의 완전한 그리고 특정한 구성원으로 자

신의 자아를 파악하는 것을 배운다.

(2004a:354)

  나(I)는 타자에 의해 인정됨으로써 번영하는 사회적인 나(I)다. 상호 인정은, 개인들이 서로

를 완전하고 동등한 참여자로 인식하는 곳에서, 인간의 번영을 최대한으로 허용하는 조건이

다. 호네트의 출발점이 정신현상학(Philosophy of Spirit ) 이전 헤겔의 예나(Jena) 시절의 인

정에 관한 사색적 설명이지만, 그는 사회화에 대한 미드(Mead)의 작업을 통해서 인정 개념을

발전시키려 하며 정신분석학의 영향을 받은 방대한 미디어 연구 문헌에서 거의 언급되지 않은

주체 형성과 상호주관적 전회에 관한 사유의 정신분석학적 경향에 주목한다 (Honneth 1995;

Benjamin 1990, 1995; Winnicott 1965). 여기에서 잠재적으로 미드를 통해서 3세대 비판이

론과 최근에 상당한 지적 부흥을 이룬 미국의 실용주의(pragmatist) 전통 사이에 많은 흥미로

운 연결이 존재한다.

  만약 인정이 인간의 번영에 필수적이라면 (호네트는 이를 인정에서 ‘의사-선험적 이해관

계’(quasi-transcendental interest)라고 칭한다), 행위의 도덕적 과정은 모두에게 인정의 조

건을 확대하려고 시도하는 것이며, 이는 반드시 불인정하는(misrecognise) 사유 양식에 대한

비판과 관련된다. 그렇다면 이데올로기 비판뿐만 아니라, 인정도 정치적 행위를 판단하는 기

준을 제공할 수 있다: 만약 이러저러한 일이 발생하면, 그것은 더 커다란 인정의 상황을 야기할 것인가 그렇지 않은가?

  호네트에 따르면 정의의 복수 이론(plural theory of justice)의 토대를 형성하는 근대 사회

의 세 가지 인정 원칙이 존재하는데, 그것은 사랑(love), 평등(equality), 공적(merit)이다. 사

회는 이 기준들과 관련하여 얼마나 잘 작동하는가에 따라서 판단해야 한다. 실제로, 사회적

투쟁과 사회적 행위는 그것이 이들 영역에서 인정의 관계를 진전시키려 하는가 아니면 방해하

는가에 따라서 판단되어야 한다.

  비판 개념을 정당화 한 후에, 비판이론의 과제는 사회의 궤적을 설명하는 것이다: 왜 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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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진보 또는 퇴보하는가? 이 기획에서 이데올로기 비판의 특정한 과제는 어떻게 그리고 왜

불인정(misrecognition)이 일어나며 어떻게 그것이 제도적 관행과 일상의 관행을 통해서 물질

적으로 생산되고 재생산되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호네트는, 하버마스에 근거하여, 평등의 원칙을 통해 인정이라는 관점에서 분명한 진보가

만들어진 것은 오직 근대적인 법의 영역이었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보편적 참정권). 호네

트가 이 과정을 완전하거나 되돌릴 수 없는 것으로 보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

어, 계속되는 동성애자에 대한 차별, 이민자와 망명 신청자에 대한 제한, 급속한 글로벌화와

사회・기술적 변화의 시대에 ‘복지’ 국가를 뒤로 돌리려는 것 등).

  대조적으로, 자아존중(self-esteem)과 공적의 인정이라는 점에서는 진보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호네트는 공적과 성취의 개념이 자본주의적 가치나 지위 시스템에 의해 대체로 식민

화되었다고 주장한다. 이는 생산과 소비의 영역 모두에서 사실이다. 몇몇 형식의 일은 (예를들어, 인정과 인간의 번영을 위한 조건을 정립하는데 근본적이라고 사람들이 주장하는 타자를

돌보거나 양육하는 데 관련된 일은) 체계적으로 평가 절하되었다. ‘공적’은 생산자들(일터에서

등등한 참여자가 아니라 단지 생산과정의 도구로써 그들을 불인정하는 것)이나 생산에 의해

영향 받는 자들(예를 들어, 생산의 생태학적 결과에 의해 영향을 받는 사람들)의 폭넓은 사회

적 작업의 결과가 아니라 이윤에 연결되었다. 소비에서의 지위는 다른 시민, 생산자, 소비에

의해 영향 받는 사람들에 대한 소비의 결과가 아니라 소비되는 양이나 파악된 질(quality)에

의해 (따라서 브랜드와 불평등 관계를 정립하고 유지하기 위한 그 상징적 중요성) 관련되었다.

따라서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데올로기 비판은 국가, 인종, 성별 질서뿐만 아니라 자본주

의 신분 질서에 대한 비판을 뜻한다. 인간의 번영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충족되어야 하는 조

건을 강조하는 인정 윤리학의 관점에서 볼 때, 이 신분 질서의 발전은 사회 내에서 그리고 사

회들 사이에서 경제적・정치적 불평등을 정당화하는데 봉사하는 병리현상으로 여겨진다.

  그러므로 이데올로기 비판은 현재의 신분 질서 비판과 인정의 원칙에 토대를 둔 새로운 질

서의 구축에서 중심적 역할을 가진다. 호네트 작업의 함축의미는 자본주의 신분 질서가 자본

주의 시장에서 개인의 성과에 토대를 둔 공적 개념이 아니라 개인이 인간의 복지에 대한 기여

라는 공적에 토대를 둔 신분 질서로 대체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정치에서 중도

좌파와 중도 우파 정치인들에게 널리 받아들여지는 공적주의(meritocracy)라는 아이디어는

이데올로기 비판의 주요 대상이다. 여기에서 ‘공적’은 종종 자본주의 시장에서 성공할 동등한

기회를 뜻하는데, 이는 공적의 측정수단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정당화되지 않는

신분 불평등의 관점에서 이러한 불평등을 이해하는 것은 막스 베버(Max Weber)의 미디어와

문화 분석에 대한 작업의 잠재적인 중요성을 상기시킨다. 이는 프레이저가 지적한 바 있다

(Fraser 2004:377). 베버는 미디어 연구에서 거의 다루어지지 않은 중요한 사회학적 인물이

다.)

  신칸트주의 또는 신헤겔주의의 어떤 방식에서 비판을 정당화하는 것이 최선인가를 두고 프

레이저, 톰슨, 호네트가 구별될 수 있겠으나, 그들은 모두 인정의 중요성과 신분 질서 비판에

동의한다. 그들이 달성하려는 사회의 종류는 매우 유사하다 — 평등한 참여, 강요의 부재, 포

용에 토대를 둔 사회 — 그들의 불일치는 어떻게 최선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가에 관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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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의미에서, 주장의 어떤 면이 보다 설득력 있는가를 결정해야 하지만, 다른 의미에서는

실제의 이데올로기 비판에서 어느 한쪽의 주장을 받아들이는 한 불일치의 의미는 사소하다.

나는 한 권의 『파이낸셜 타임즈』와 함께 한 방에 갇힌 프레이저 지지자와 호네트 지지자가 유

사한 이데올로기 비판을 할 것이라고 본다. 이데올로기 개념을 버리기 전에, 우리는 적어도선택 가능한 것들 중 어떤 것도 만족스럽지 않은가에 대해 우리 스스로를 확신시켜야 한다.

나는 이러한 토론이 미디어 연구에서 벌어지는 것을 보지 못했고, 사실상 이 토론이 정치철학

에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많이 언급하는 것도 보지 못했다.

  우리가 지배가 아니라 인정을 토대로 삼고자 한다면, 우리는 이데올로기 연구의 의미를 다

시 만들 수 있다:

이데올로기를 연구하는 것은 불인정(Missachtung )이 발생하는 방식을 이해하고 설명하는 것이

며 어떻게 불인정이 경제적인 그리고/또는 정치적인 권력의 작동과 관련되어 있는가를 이해하고 설명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불인정은 부당한 예속뿐만 아니라 부당한 우월함의 표현을 가리킨다. 그것들은 이

데올로기의 양면(recto and verso)이다.

  복수의 정의 개념화를 계발하는 최근의 작업에서, 호네트는 제도적 맥락에서 불인정을 설명

할 필요가 있음을 점차 명확히 알게 되었다: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내가 인정의 제도적 형식, 인정의 이데올로기적 형식의 실상을 언제나

충분히 인지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는 내게 있어서 아직도 해결해야 할 어려운 문제이다 ...

내가 해야 할 것은 분명히 그릇된 인정의 형식과 올바른 인정이라는 의미에서 정당화된 인정

의 형식 사이의 차이를 밝힐 개념적 수단을 지키는 것이다.

(2004b:388)

  앞에서 나는 합리적인 학문적 노동 분업을 언급했다. 우리가 청년 헤겔의 독해를 통해서 비

판이론을 회복시키기 위하여 호네트에 의존해야 하고 인정과 불인정 사이의 윤리적 구별의 중

요성을 보고자 한다면, 미디어 연구자들이 우리의 제한적인 분석 분야에서 어떻게 그리고 왜

불인정이 발생하는가에 관한 설명을 제공함으로써 호네트를 돕는 것이 분명히 합리적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호네트가 문제를 해결하도록 돕고 호네트의 비판이론 재구성과 미디어

연구 분야의 이데올로기 비판 사이의 연결을 제공하기 위하여 이데올로기의 작동 양식과 상징

적 구성 전략에 관한 톰슨의 작업을 유용하게 다시 도입할 수 있다. 우리는 큰 노력 없이도

톰슨의 수수한 개념적 진전을 호네트의 인정 이론에 접합할 수 있다. 문제는 이론적인 것이라

기보다 실제로 분석을 행하는 것이다.

설명: 이해관계에서 사회병리학의 이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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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톰슨의 이론을 호네트에 추가함으로써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

다. 톰슨은 심리학적 관심의 결핍이라는 문제를 겪고 있다. 톰슨은 이데올로기 개념의 재구성

에서 보다 체계적인 이데올로기 논의의 출발점으로 보고 있는 『정치경제학 비판 서문』

(Preface to a Critique of Political Economy ) 시절의 맑스로 되돌아간다. 맑스에게 이데올로기란 계급의 이해관계를 표현하고 유지하는 방식이다. 이제 톰슨은 이를 오늘날 상대적으로

논란이 없는 두 가지 방식으로 수정하고자 한다. 첫 번째는 계급 지배가 현대 사회에서 유일

한 지배 형식이 아니며, 따라서 이데올로기 비판은 보다 넓은 범위를 포괄하도록 확장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성역할(gender), ‘인종’, 민족, 성(sexuality) 등). 두 번째 방식은 토대-상부구

조 은유에 의문을 던지고 상징적인 것을 부속물이 아니라 ‘사회적 현실의 필수요소’로 간주하

는 것이다 (1990:58). 이데올로기가 여전히 지배계급, 성 또는 ‘인종’의 ‘이해관계’를 표상한다

는 맥락에서 톰슨이 맑스를 수정하지 않는  곳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따라서 톰슨은, 이데올로기의 존재 이유에 대한 설명을 가정한 속에서, 자신의 모든 노력을기울여서 어떻게 이데올로기가 상징적으로 그리고 제도적으로 생산되고 재생산되는가를 이해

하고자 한다. 여기에서 현존하는 것은, 블랙박스, 권력 의지 또는 지배 의지의 실질적인(de

facto ) 자연화이고, 홉스주의적인 만인에 대한 전쟁이다. 우리가 이런 인간 행위자의 단순한

모델을 가지고 작업한다면, 이데올로기의 존재를 설명하는데 실패할 뿐만 아니라 평등주의 세

계에서 살고자 하는 소망을 설명하는데 실패할 수밖에 없다. 이데올로기에 대한 반대는 새로

운 행위자 집단에 의한 또 다른 이데올로기를 주장하려는 시도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필요

한 것은, 어떻게 이데올로기가 작동하는가에 관해 이해하는 것뿐만 아니라, 인간 행위자의 복

잡함을 인정하면서 왜 이데올로기가 작동하는가에 — 호네트의 표현을 사용하자면, 왜 사회적

병리현상이 발생하는가에 — 대한 설명이다. 『서문』의 맑스는 이 점에서 우리를 도와주지 않

는다. 이데올로기가 이해관계를 반영한다는 개념은 이치에 많지 않게 갑작스러운 결말을 가져

오는 설명이다. 여기에서 ‘이해관계’는 신의 기계적 출현(deus ex machina )[고대 그리스 비극

에서 해결될 수 없도록 뒤틀린 상황이 파국 직전에 무대 꼭대기에서 기계장치를 타고 내려온 신의

명령에 의해 해결되는 기법]이다. 왜 불인정이 발생하는가? 왜 지배하려는 욕망이 존재하는가?

왜 지배자와 피지배자에 대해 지배를 정당화시키려는 욕구가 존재하는가? 톰슨의 이데올로기

의 어떻게(how)에 관한 설명은 그 존재에 대한 설명을 동반할 필요가 있다. 이 과제에서, 심

리적인 것을 경제적 환원론으로 대체하지 않고 이데올로기 비판에서 미디어 텍스트의 사회-역

사적이고 형식적인 분석인 사회병리학(social pathology)이 정치경제학과 함께 자리 잡아야

한다. 슬라보예 지젝(Slavoj Žižek)은 정신분석학이 ‘맑스주의 이데올로기 이론의 빠진 부분을

제공하는 데 (또는 이데올로기 이론의 교착상태에 관해 가시적인 맑스주의 이론의 부족함을

보다 정확하게 설명하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1994:29), 그가 보기

에 맑스주의의 형식과 호환 가능한 것으로 프로이트(Freud)의 사회 심리학을 증거로 인용한

다. 지젝 작업의 상대적인 장점이 무엇이든지 간에, 여기에서 그는 이데올로기 개념에서 몇몇

수리가 필요한 작업을 간결하게 지적한다.

  그러나 미디어 연구에서 라캉주의(Lacanian) 정신분석학 이론의 인기는, 여기에서 도덕적이

고 정치적인 투쟁의 원천으로서 인정의 중요성을 명심하는데 보다 도움이 되는, 정신분석학

사상의 상호주관적(intersubjective ) 조류를 상대적으로 소홀히 하도록 만들었다 (Winnicott

1965; Benjamin 1990, 1995; Kohut 1971; Billig 1999; Whitebook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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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는 달성하기 매우 어려운 과제임이 분명하나, 제도가 가능하게 만들거나 제한하는, 인간

행위자와 그들의 동기부여를 한층 두텁게 묘사하는 것(thick descriptions)은 경제적 또는 심

리적 환원론을 가지고 인간 행위의 본성에 관한 조악한 가정에 토대를 둔 설명을 제공하는 것보다 훨씬 더 뛰어난 것이다. 상호주관적 심리학 외에 미디어 연구가 다루지 않은 또 다른 원

천은 폴 디마지오(Paul DiMaggio)와 월터 파웰(Walter Powell)이 연구한 종류의 신제도주의

분석이다. 이는 상징적 의미 분석을 보다 넓은 제도적 분석 안에 끼워넣는데 도움이 될 것인

데, 이는 이데올로기 비판이 텍스트에 대한 비물질적인(disembodied) 분석 이상이 되고자 한

다면 필요하다 (1991). 톰슨의 작업이 상징적 분석을 체계화한다는 관점에서 이데올로기 개념

을 진전시키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면, 심리학적 사유와 연결되지 못한 그의 실패는 1세대

프랑크푸르트학파로부터 한 걸음 후퇴한 것이다. 부르디외의 잘 알려진 작업에 덧붙여서, 신

제도주의 분석 양식의 발전은 상징적 분석을 보다 폭넓은 유물론적 분석 안에 위치시키려는

미디어 연구자들에게 유익한 원천으로 입증될 수 있다.

정치적 실천: 확언 전략에서 변형 전략으로, 정체성 정치에서 해방으로

  경제적 착취의 경험은 현상학적으로 불인정, 무례함, 굴욕감의 경험에 대해 이차적이라는

호네트의 주장이 옳다면, 이는 정치 투쟁에서 이데올로기 비판의 중심적인 정치적 중요성을

강조하는데 기여한다 (2004a:352). 이를 통해 호네트가 의미하는 것은 주체가 불인정을 느낄

때 권력의 재분배에 대한 투쟁이 중요해지며, 따라서 재분배에 대한 투쟁은 인정 투쟁과 분리

된 것이 아니라 그 일부라는 것이다. 이는 이데올로기 비판의 중심적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불평등한 지위와 경제적・정치적 불평등이라는 사실에서 ‘허위의식’(false

consciousness), 불인정의 수용(acceptance of misrecognition)이라는 가정으로 건너뛰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허위의식과 진정한 의식이라는 개념은 타당하지 않는데, 그것들이 서로

논리적으로 연결되는 두 개의 비교 불가능한(incommensurable) 개념적 계획의 존재를 제안

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조악한 방식으로 생각하기보다, 하나의 복합적이자 불평등한 과정으로

서 불인정과 인정 사이의 변증법적 투쟁으로 상황을 생각하는 것이 낫다. 허위의식이 아니라

잘못된 믿음과 일련의 잘못된 믿음들을 말하는 것이 이치에 맞는다. 그러나 그러한 믿음의 존

재를 설명하려면, 이데올로기적인 작동과 전략의 존재를 고려해야 할 뿐만 아니라 수용 상황,

어떻게 그리고 왜 그러한 작동을 수용하고, 거부하거나 교섭하는가를 고려해야 한다.

  이데올로기의 작동과 수용 사이의 관계가 단순하지 않다면, 거부와 정치적 행위 사이의 관

계도 마찬가지로 복잡하다. 명시적인 정치적 투쟁의 부재는 불인정을 받아들인 결과가 아닐

수 있다. 불인정에 대한 비판은 필요하지만, 계몽되고 진보적인 정치적 행위의 충분조건이 아

니다. 힘들의 균형에 달려 있는, 인지된 성공의 전망과 같은 다른 요인들이 분명히 중요하다.

그러나 인정의 중요성은 정치 투쟁에서 이데올로기 비판의 중심성을 함축한다. 그것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

  정치적 실천의 한 형식으로서 이데올로기 비판과 다른 형식들 사이의 관계는 톰슨이 체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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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발전시킨 논점이 아니다. ‘개입’(intervention)으로서 이데올로기 비판에 관한 몇 마디

언급이 있으나 더 이상의 정치적 함축의미는 제시되지 않는다 (1990:323). 그러나 톰슨의 이

론이 내적으로 그러한 함축의미의 제시를 이를 막지는 않지만, 톰슨의 작업에서 그 부재는 비

판이론가와 정치적 활동가 사이의 불운한 별거의 징후다.

  프레이저와 호네트가 모두 인정 개념을 채택하지만, 모두 정체성 정치를 거부하는데, 최근

에 인정 개념은 이를 통해서 관련되어왔다. 그들은 정체성 정치가 특정한 집단 정체성을 위한

인정을 얻으려 한다는 점에서 정체성 정치를 비판한다. 프레이저와 호네트는 보편주의자이기

에, 특정 집단을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완전하고 평등한 참여자로서 개인에 대한 인정

을 얻고자 한다. 프레이저는 정체성 정치를 (특정 집단의 문화적 특성이라는 가치가 정해지는

(valorised)) 확언의 전략(affirmative strategy)과 연결하는데, 반면에 그녀는 지금까지 구별

된 정체성들이, 이전에는 구별되는 것으로 여겨졌던 집단들로부터의 개인들이 똑같은 공동체

안의 동등한 개인들로 보이도록 하기 위해 변동을 겪는 변동의 전략(transformativestrategy)을 주창한다. 따라서 이데올로기 비판은 정치적 실천의 중요한 구성요소인데, 그것

은, 변형되지 않는다면, 개인과 집단 정체성의 구성을 이해하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

정 관계를 수립하려는 정치적 실천의 충분조건은 아니나 필요한 부분이다.

  낸시 프레이저는 그녀의 정치철학과 정치투쟁 사이의 관계를 논의해왔다. 그녀는 기본적으

로 두 가지 정치적 전략이 있다고 주장한다: 확언과 변동. 확언 전략은 두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 그것은 ‘스스로를 모두 너무 쉽게 분리주의와 억압적인 공동체주의에 내주는 집합적 정

체성을 물화하는(reify)’ 경향이 있다 (2004:76). 둘째, ‘그것은 종종 불인정의 반발을 일으키’

면서, ‘박탈의 상처에 무례함이라는 모욕을’ 덧붙인다 (2004:76-7). 대조적으로 변동 또는 해

체 전략은 ‘부당한 신분 구별을 불안정하게 만들려’ 하면서, ‘흑인/백인 또는 게이/이성애자와

같은 우쭐대는 주인의 이분법을 소문자의 차이(lower-case differences)라는 탈중심화된 한

덩어리로’ 대체하고자 한다 (2004:77).

  따라서 분명히 프레이저는 변동 전략을 선호한다. 그러한 전략은 톰슨의 이데올로기 개념

및 다양한 양식의 이데올로기 작동 비판과 매우 편안하게 어울린다. 그것은 또한 호네트의 보

편주의와도 잘 어울린다. 인정은 무엇보다도 특정한 종류의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인간

으로서 인정받음을 뜻한다. 그러한 보편적 토대 위에서 특정 개인이나 집단이 실제로 인정받

기 위하여 필요로 하는 것에 관한 투쟁이 가능하다.

  이러한 인정과 이데올로기 개념의 보편적-변동적 사용은 이질적으로 보이는 정치 운동을 잠

재적으로 함께 가져오도록 도와준다. 그들의 인정 투쟁은 상호 지원이 마땅한 똑같은 도덕적

투쟁, 끝나지 않은 해방의 계몽 기획의 필수적인 요소로 여겨진다. 불인정에 맞서는 투쟁은

신분의 차이와 경제적・정치적 불평등을 정립하고 유지하는 유사한 사유와 행위에 맞서는 투

쟁이다. 그러한 변동 전략은 윤리적으로 그리고 인식론적으로 올바를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

도 실천적이다. 확언 전략의 주창자는 그러한 전략이 억압받는 집단에게 가장 호소력 있는 것

이라고 주장하겠으나, 변동 전략의 주창자도 소문자의 차이를 가진 개인들로 구성되는 대문자

의 해방 운동 발전을 고무시키기 때문에 자신의 전략이 정치적으로 가장 실천적인 위치를 가

진다고 주장할 수 있다. 이는 아마도 진보적인 정체성과 다문화주의 확언 정치와 어울리지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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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다는 점이 이데올로기 비판의 부활의 중요성을 입증한다.

우리가 바로잡을 수 있을까? 미디어 이론, 실천 그리고 비판적 상상

  마이클 뷰러웨이(Michael Burawoy)은 2004년 미국 사회학회 회장 연설에서 ‘공공 사회학’

의 재발명, 학계뿐만 공중 또는 공중들을 포괄하며 비판적 상상력을 통해서 보다 나은 세계의

창조에 기여하려고 명시적으로 시도하는 사회학을 요청했다 (Burawoy 2005). 보다 많은 공공

사회학뿐만 아니라, 우리는 비판적 상상력이 되돌아오는 공공 미디어 연구가 필요하다. 영국

에서 미디어 연구의 공적 이미지를 고려하건대, 그것은 상아탑으로 (또는 적어도 사무실로) 퇴

각하도록 부추기거나 백색 코트와 커다란 안경을 걸친 채 공공 앞에 나서도록 부추길 따름이

다. 뷰러웨이의 연설이 자극하는 학제의 본질에 관한 열정적인 토론이 미디어 연구 분야에도

있어야 한다.

  희망을 잃은 우울한 자들을 위해서 맑스가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17번째 테제에서 동원하는

신념이 존재한다: 철학자들은 지금까지 세계를 다양하게 해석해왔는데, 문제는 세계를 바꾸는

것이다. 이는 인정의 원칙이 어떻게 사회 투쟁에 적용될 수 있는가의 문제를 제기한다. 어떤

투쟁이 일축되고 어떤 것이 지지되는가? 이는 도덕적 평가의 문제일 뿐 아니라 정치적 효과의

문제다:

우리가 더 이상 어떻게 오늘날의 사회적 투쟁이 적절히 이론적으로 분석될 수 있는가를 논의

하지 않고, 그것의 도덕적 평가의 문제로 전환하자마자, 규범적인 것으로의 전회가 필수적이

다. 우리가 모든 정치적 봉기를 찬성할 수는 없으며, 모든 인정의 요구를 도덕적으로 정당하거

나 수호할만한 것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오히려, 좋은 또는 정의로운 사회에 대한

우리의 개념에 가까이 가는 것으로 우리가 파악할 수 있는 사회적 발전의 방향을 투쟁이 가리

킬 때에만, 일반적으로 우리는 그러한 투쟁의 목표를 긍정적으로 판단한다. 자연히, 원칙적으

로, 다른 판단기준이 여기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 사회적 효율성이나 안정을 보다

목적으로 하는 판단기준이 그러하나, 그것들 또한 규범적 의미와 사회 질서의 목적에 관한 더

높은 수준에서 만들어지는 가치 판단을 단지 반영할 따름이다.

(Honneth 2004a:353)

  이 정치적 판단과 행위의 부분집합은 미디어와 문화적 제도에 연결된다: 미디어 학자들은현재 대체로 스스로를 미디어 활동가가 아니라 미디어 제도의 전문적 해석자로 스스로를 간주

한다. 전문화가 장점을 가지지만, 그것은 또한 우리가 1970년대와 1980년대의 미디어와 문화

연구에서 중심적이었던 폭넓은 윤리적・정치적 관심의 시야를 상실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인정’이 잃어버린 차원을 새롭게 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가? 우리의 좋은 또는 정의로운

사회 개념에 보다 긴밀하게 조응하는 미디어 제도를 만들기 위하여 어떻게 행위하는 것이 최

선인가? 물론, 우리는 먼저 상호 인정의 원칙 속에서 만들어지는 미디어 제도가 어떤 것인가

에 관해 아이디어를 가져야만 한다. 그러한 비전은 비판을 가능하게 할 뿐만 아니라 성공적인

정치적 행위의 필요조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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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방에 대한 신념을 공유하는 사회과학자들을 함께 묶어주는 주목할 만한 하나의 시도는 에

릭 올린 라이트(Erik Olin Wright)가 이끄는 리얼 유토피아 프로젝트(Real Utopias project)

다 (http://www.ssc.wisc.edu/~wright/RealUtopias.htm). 이 프로젝트의 초점은 현재의 상

태를 분석한다기보다 해방의 방향을 이끌 정치 행위를 위한 아이디어가 어떻게 계발될 수 있는가를 사유하는 것이다. 컨퍼런스와 서적들은 민주주의의 보다 참여적이고 숙의적인 형식들

을 발전시키는 쟁점들, 시장 사회주의가 작동할 수 있는 방법, 연금 펀드가 자본주의 경제를

통제하도록 사용될 수 있는 방법, 입법이 성역할 관계에서 해방적 변화를 이끌 수 있는 방법

등을 고려해왔다. 최근에는 기본 수입 또는 시민의 수입, 모든 사람이 수입이나 일할 의지와

관계없이 받는 최소 보장 수입에 관한 아이디어에 주목해왔다 (Cohen and Rogers 1995;

Bowles and Gintis 1999; Fung and Olin Wright 2003; Ackerman et al . 2006). 로버트

맥체스니(Robert McChesney)가 이끄는 컨퍼런스를 개최하고 어떻게 미디어 제도가 보다 해

방적으로 변화될 수 있는가에 관한 책을 제작할 계획이 있다.

  미디어 연구에서 비판적 학문에 관한 강조를 고려하건대, 내가 아는 한, 해방을 촉진할 미

디어 시스템이 무엇인가에 관한 청사진을 만들려 하거나, 적어도 현재 미디어 제도가 조직되

어 있는 방식에 대해 공적으로 대응하려는 학자 집단이 존재하지 않는다. 비판적 학문의 풍요

로움이 정치적 참여의 증가에 의해 조응되지 않아왔다. 미디어 이론 및 분석과 미디어 정치적

실천은 단절되어 있다. 미디어 비평뿐만 아니라 미디어를 구성할 필요가 있다. 인정은 비판과

구성에서 모두 중심적인 개념의 역할을 할 수 있고, 따라서 이론과 실천을 함께 묶는데 핵심

적이다. 오랫동안 미디어 연구의 후미진 곳으로 여겨졌으나, 몇몇 대안적 미디어 학자들이 최

근 몇 년간 특히 '공공적'이었다. '우리의 미디어'(Our Media/Nuestros Medios) 네트워크는

2000년에 세워졌고 이제 40개국 500명 이상의 회원을 가지고 있다. 네트워크는 실질적으로

그리고 다른 방식으로 학자와 활동가를 함께 묶는 것을 목표로 한다; 풀뿌리 미디어의 제작을

격려함으로써 미디어를 민주화하기; 그리고 시민 미디어를 지원하는 미디어 정책에 영향을 미

치기. '우리의 미디어' 프로젝트의 가장 인상 깊은 면 중 하나는 그것이 북미와 서유럽 학자들

에 의해 전적으로 지배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영어뿐만 아니라 스페인어로도 소통되며 부유한

지역뿐만 아니라 남미와 아시아에서도 컨퍼런스가 개최되었다 (www.ourmedianet.org). 이

네트워크의 공공연하게 행동주의적이며 범세계적인 의제는 주류 미디어 연구 내의 다른 전공

분야에 의해서도 모방할 가치가 있다.

결론

  미디어 연구에서 이데올로기 개념의 부재는, 코너의 에세이와는 달리, 환영할 것이 아니라

미디어 연구 분야의 철학적-정치적 포부의 결핍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는 미디어 연구 분야의

커지는 성숙성뿐만 아니라 보다 넓은 지적・정치적 운동의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아마도

지금이 점차 탄탄해지고 전문화된 분야가 한편으로는 사회이론과, 다른 한편으로는 정치적 실

천과 재연결하기 위하여 다시 한 번 밖으로 눈을 돌려야 할 때인가? 3세대 비판이론뿐만 아

니라, 신제도주의 분석 분야의 작업과 상호주관적 심리학은 사회를 총체적으로 이해하려 하고

비판 사회과학의 해방적 목표를 향해 인도하는 실천을 통해 기여하려 하는 미디어 분석에 분

명히 도움을 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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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너는 미디어 연구에서 빈번히 사용된 이데올로기 개념이 연구를 저해했는데, 왜냐하면

‘그 개념이 현존하지 않는 매개 과정(mediation processes)을 이론적으로 정밀하게 파악할

것을 제안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면서 자신의 부고를 결론짓는다. 그 결과, ‘우리는 수리 중인 시도의 막다른 길에 도달했다고 보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의미, 가치, 사

회 구조와 권력의 상호 연관에 관한 보다 진전된 연구와 주장을 추구할 수 있는 더 나은 상태

에 있게 되었다’ (2001:532). 이데올로기라는 과장된 웅장함 대신에, 우리는 매개 과정의 복잡

함에 대한 주의 깊고 정밀한 분석을 필요로 한다.

  코너와는 대조적으로, 이데올로기 개념에는 복잡함을 인정하는 정밀한 분석을 반드시 저해

하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고 여기에서 주장해왔다. 더욱이, 사회과학의 비판적 이해에서 그러

한 개념이 없다면, 우리는 가치와 권력의 중요성을 놓칠 것이며, 따라서 세계를 변화시키는

바람직한 상황을 놓칠 것인데, 이는 코너가 역설적으로 계속 주목하고자 한 바로 그것이다.

참고문헌

Honneth, A. (1995). The Struggle for Recognition: the Moral Grammar of Social

Conflicts. Cambridge: Polity Press. 문성훈・이현재 역 (2011). 『인정투쟁: 사회적 갈등의

도덕적 형식론』. 사월의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