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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회보 40| 2013. 을호 www.kimkoomuseum.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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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회보제 40호 | 2013. 가�을호

www.kimkoomuseum.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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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 김구 선생은 누구보다 문화의 중요성을 인식한 선구자였다. 백범 김구 선생이 이 글을 쓴 것은 1947년 국사원에서 『백범일지』를 간행하기로

한 즈음이었다. 38선으로 나뉘어진 조국, 오랜 식민지 생활로 인해 황폐화된 조국의 현실 앞에서 백범 김구 선생이 꿈꾸었던 조국의 모습을 세계

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 새로운 문화의 근원이 되고, 모범이되는 나라였다. 이 한 단락의 글만으로도 백범 김구 선생의 깊은 철학의 단면을 알

수 있게 한다.

Prologue

내가 원하는 우리나라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부력(富

力)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强力)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지금 인류에게 부족한 것은 무력도 아니오, 경제력도 아니다. 자연과학의 힘은 아무리

많아도 좋으나, 인류 전체로 보면 현재의 자연과학만 가지고도 편안히 살아가기에 넉넉하다.

- 백범 김구의 「나의소원」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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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가을 03

SPecial Column |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독립운동 방략과 한국광복군

SPecial History i | 1930년대 중국동북지역의 한·중 연대 항일투쟁

SPecial History ii | 인도-미얀마 전선에서 활약한 한국광복군

SPecial History iii | 미국 OSS와의 공동작전을 전개한 한국광복군

ouTSiDe FoCus | 대한민국임시정부 장정(長程)의 첫 기착지, 항저우(杭州)

시선집중 | 백범 김구 선생이 내신 곧은 길을 따라 오늘 우리가 걷는다

인연(因緣) |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살림꾼 정정화

cloSe-up | 백범은 문화예술 운동가입니다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정양모 부회장

역사의 현장 | 충남 공주 마곡사

다시 읽는 백범일지 I | 2013년 『백범일지』독서감상문쓰기대회

다시 읽는 백범일지 II | 진정한 애국심이란 무엇인가?

특별한 하루 | 백범 김구 선생과 독립운동가들의 나라사랑, 겨레사랑 정신을 느끼다

줌인, 현장 속으로 I | 2013 청소년 백범문화캠프

줌인, 현장 속으로 II | 가족과 함께 떠나는 역사탐방

통일교육 가이드 | 통일의 필요성 인식하기

백범김구기념관 news

참여 마당 | Quiz Quiz 통!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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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o. T. e. n. T. S.

발행일 2013년 9월 16일 통권 40호 | 발행인 김 신

발행처 백범김구기념관 | 사단법인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140-898 서울시 용산구 효창동 255 www.kimkoomuseum.org

기획·편집·인쇄 | (주)성우애드컴 02-890-0900 | 「백범회보」에 실린 글 중에는 우리 협회와 의견이 다른 글도 있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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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회보04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이해하고 있는 것 중에 잘못 된 것이 하나 있다. 임시정부의

독립운동 방략을 외교활동 중심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 그것이다. 물론 임시정

부는 수립 직후 파리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하여 열강들을 대상으로 활발한 외

교활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1월부터 제1차 세계대전의 전후문제를 처리하기 위

해 파리에서 강화회의가 열리고 있을 때, 이미 파견되어 있던 김규식을 외무총장

으로 선임하고, 그를 임시정부의 전권대표로 임명하여 외교활동을 전개하도록 한

것이다. 아마도 이것이 임시정부의 독립운동 방략을 외교활동으로 이해하게 된

원인이 아닌가 생각된다. 임시정부는 외교활동에도 주력하였지만, 기본적으로는

군대를 편성하여 일제와 독립전쟁을 전개하고자 하였다. 이것이 임시정부의 핵심

전략이었다. 임시정부는 수립 직후부터 시정방침을 통해 독립운동의 방향을 밝힌

바 있다. 여기에는 내정·외교·군사·교육·재정·문화 등에 대한 계획들이 다양하

게 언급되어 있지만, 그 중에서도 핵심적인 것은 군대를 편성하여 독립전쟁을 전

개한다는 군사활동에 관한 것이었다. 임시정부가 군사활동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

을 수립한 것은 1919년 말이었다. 임시정부는 1919년 9월 11일 노령·상해·한성에

서 수립된 세 임시정부의 통합을 이루었고, 통합정부의 출범과 더불어 군사활동

에 대한 총체적인 계획을 수립하였다. 1919년 12월 18일에 발표한 ‘대한민국임시

군제’ ‘대한민국육군임시군구제’ ‘육군무관학교조례’가 그것이었다. 이는 임시정부

가 군대를 편성하여 독립전쟁을 전개한다는 기본 원칙하에 군대의 편제와 조직,

병력의 모집과 동원, 군대를 지휘할 군사간부 양성 등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임시정부가 편성하려는 군대의 규모는 군단이었고, 병력은 1만 3천명에서 3만 명

정도를 상정하고 있다. 당시 독립운동가들은 일본과 전쟁을 전개할 수 있는 병력

의 규모를 1만 명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 임시정부는 독립전쟁을 전개한다는 목

표 하에 대일항전을 전개할 수 있는 군대를 편성하고자 한 것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독립운동 방략과 한국광복군

한시준단국대 역사학과 교수,

백범학술원장

SPecial Colum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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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가을 05

‘임시군구제’는 병력을 모집하는 방안이었다. 병력은 만

주와 연해주지역에 있는 한인들을 대상으로 모집한다는

방침 하에, 이 지역을 3개 군구로 나누었다. 즉 하얼빈

이남과 길림성·봉천성 일대를 서간도 군구, 연길현 일대

를 북간도 군구, 노령 일대를 강동군구로 나누고, 각 군

구에 거주하고 있는 20세 이상 50세 이하의 한인들을

군적에 편입시킨다고 하였다.

‘육군무관학교조례’는 육군무관학교를 설립하여 군사간

부를 양성한다는 계획이었다. 군사간부 양성을 위해 군

무부 산하에 육군무관학교를 설립하였다. 초급장교를

양성하기 위한 것이었다. 군무부 차장이 교장을 맡았고,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출신들이 교관을 맡았다. 훈련

은 6개월로 정하였다. 1920년 5월 첫 졸업생으로 19명

을, 그해 12월에는 24명을 배출하였다. 이후 제3기생의

교육을 실시하다가 중단되었다.

임시정부는 수립 직후 군대를 편성하여 독립전쟁을 전

개한다는 계획을 수립하였지만, 계획대로 실행되지 못하

였다. 인적·재정적 문제 등 여러 가지 요인이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수립 직후부터 대통령 이승만에 대한 탄핵

문제를 둘러싸고 파란을 겪은 것이 가장 큰 요인이었다.

이로 인해 많은 인사들이 임시정부를 떠났고, 재정적인

뒷받침도 이루어지지 못한 것이다.

임시정부는 의열투쟁으로 방략을 바꾸었다. 군대편성은

많은 인원과 자금이 필요한 것이지만 의열투쟁은 적은

인원과 자금으로 수행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1931년

임시정부 국무회의에서는 의열투쟁을 전개하기로 하고,

그 책임을 김구에게 맡겼다. 책임을 맡은 김구는 젊은

청년들을 중심으로 한인애국단을 결성하고, 1932년 1월

단원 이봉창의사로 하여금 일왕처단의거를, 또 4월에는

윤봉길의사로 하여금 상해의 홍구공원의거를 결행하였

다. 이러한 의열투쟁은 임시정부는 물론이고 독립운동

에 활기를 불어넣은 쾌거였다. 그러나 의열투쟁은 군대

를 편성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결행한 것이었다.

임시정부의 기본 방략은 군대를 편성하여 항일전을 전

개한다는 것이었고, 중경에 정착하여 이를 실행에 옮겼

다. 임시정부는 상해를 떠난 이래 항주·진강·장사·광

주·유주·기강 등지로 옮겨다니다가 1940년 중경에 정착

하였다. 중경은 중국국민당 정부의 임시수도가 있던 곳

이었다. 이곳에 정착하면서 가장 먼저 추진한 것이 군대

의 편성이었다. 전란으로부터 안정을 찾게 되었을 때, 그

동안 실행에 옮기지 못하였던 계획을 추진한 것이다.

당시 임시정부에는 군사간부들이 적지 않았다. 지청천·

이범석·김학규 등 만주에서 독립군을 결성하여 대일항

전을 전개하였던 인사들을 비롯하여, 중국의 중앙육군

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중국군에 복무하고 있는 한인청년

들도 있었다. 그리고 임시정부 요인들의 자녀들도 있었

고, 병력을 모집할 수 있는 희망도 있었다. 일본군이 점

령한 화북지역 일대에 약 20만 명에 달하는 한인들이

이주해 있었던 것이다. 임시정부는 이를 기반으로 군대

편성을 추진하였다. 우선 지휘부인 총사령부를 구성하

여 광복군을 창설하고, 이후 병력을 모집하여 부대편제

를 갖추어 나간다는 계획이었다. 병력을 모집하기 위해

1939년 10월 군사특파단을 구성하여 서안으로 파견하였

다. 그리고 임시정부에서 활동하고 있던 군사간부들을

중심으로 총사령부를 구성하였다. 총사령은 지청천, 참

모장은 이범석이었다. 임시정부는 광복군을 창설하면서

그 계기를 천명하였다. 주석 김구 명의로 광복군 창설을

대내외에 선포하면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대한민국 원

년에 정부가 공포한 군사조직법에 의거하여 광복군을

창설한다”고 한 것이다. 1919년에 계획한 군사정책에 의

해 광복군을 창설한다는 것을 천명한 것이었다. 1940년

9월 17일 창설된 한국광복군은 임시정부가 군대를 편성

하여 항일전을 전개한다는 독립운동 방략에 의한 것이

었다. 창설 이후 한국광복군은 임시정부의 국군으로 중

국군·영국군·미국군과 함께 항일전을 전개하면서, 임

시정부의 독립운동 방략을 구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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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회보06

올해 8월 15일을 전후하여 한일관계는 그 어느 해 보다 긴장되어 있다. 일본의 독

도영유권에 대한 도발,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현직 오사카 시장의 망언, 독일 나

치스처럼 개헌하자고 한 아소 부총리의 발언 등이 계속되었고, 일본 아베 정부 각

료와 의원들의 야스쿠니신사 참배가 이어졌기 때문이다. 말할 것도 없이 일본 지

도자들의 이 같은 행동은 일본의 침략으로 피해를 입은 우리나라와 중국 등 여러

나라 국민들의 의구심을 불러일으키고, 동아시아의 안정과 평화를 해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 선열들과 애국지사들이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풍찬노숙

하며 중국 동북지방(만주)으로 이주, 망명하여 줄기차게 독립운동을 전개한 사실

을 되새기고, 그 의미를 오늘에 되살리는 일은 매우 뜻 깊은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에 필자는 주로 1930년대 중국 동북지방에서 전개되었던 항일투쟁, 특히 한국

인들과 중국인들이 연대하여 공동으로 일제에 항거했던 항일무장투쟁과 그 의미

를 간단히 살펴보고자 한다.

만주지역은 한국과 중국의 근현대사에서 중요한 요충지 일찍이 우리가 ‘만주’라고 불렀던 중국 동북지역은 부여·고조선·고구려·발해 등

여러 왕조가 존속했던 역사의 무대였고, 고려·조선 시대에도 우리민족의 활동과

매우 밀접한 관련을 가졌던 전략적 요충지였다. 특히 19세기 후반기부터 우리민족

의 이주와 정착이 본격화하였고, 20세기 전반기에는 독립운동의 강력한 근거지

가 되어 한국근현대사는 물론 중국근현대사에서도 매우 큰 영향을 끼치는 등 중

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곳이었다.

중국동북지역으로 이주한 우리 선조들은 어려운 여건에서 억척스럽게 살아가면

SPecial History i

장세윤동북아역사재단

책임연구위원

1930년대 중국동북지역의 한·중 연대 항일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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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도 조국과 민족을 위한 희생과 고통을 감내하면서 치

열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우리에게 잘 알려진

신흥무관학교와 북로군정서 사관연성소 등을 통한 인재

양성, 서로군정서와 대한통의부, 간도국민회와 대한독립

군, 정의부·참의부·신민부 등 민족자치 및 독립운동을

총괄하는 여러 기관의 활동 등은 매우 유명하다. 1920

년대 초반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 등은 일본 정규군

을 상대로 거둔 독립군의 승전으로 잘 알려져 있다.

1931년 9월 18일 일본군은 중국 동북지역(만주)을 침략

하고 (이를 ‘만주사변’, 혹은 9.18사변이라 함), 1932년 3

월 일본의 괴뢰국인 ‘만주국’을 세웠다. 이후 이 지역에서

는 중국인들의 항일투쟁이 본격화되었는데, 우리 독립

운동가들은 독자적 조직을 유지한 채 중국 의용군과 함

께 힘을 합쳐 일본군 및 괴뢰 ‘만주국군’과 싸우거나 한

중연합군을 구성하여 활동하기도 하였다.

1930년대 중국 동북지역에 있던 한국인들(이를 ‘재만한

인’으로 약칭함)이 전개한 무장투쟁은 크게 보아 세 계

열의 흐름으로 정리할 수 있다. 즉 남만주에서 국민부와

조선혁명당 산하의 무장조직으로 성립된 조선혁명군, 북

만주에서 한족자치연합회(韓族自治聯合會)와 한국독립

당의 산하무력으로 창건된 한국독립군, 그리고 중국공

산당 만주성위원회(滿洲省委員會) 산하 무장조직으로

형성·발전된 동북인민혁명군(후일의 동북항일연군)에

가입하여 투쟁한 한인 세력이 바로 그들이다.

특히 조선혁명군은 당취오(唐聚五)가 이끄는 요녕민중

자위군(遼寧民衆自衛軍)이란 중국의용군과 합세하여

1932년 5월부터 10월까지 약 6개월 동안 무려 200여 차

례에 달하는 전투를 치르며 남만주지방에서 크게 용맹

을 떨쳤다. 한편 북만주지방에서 활동하던 한국독립군

은 1933년 6월 말에서 7월 초 사이 500여 명의 병력으로

길림자위군(吉林自衛軍) 시세영(柴世榮) 부대 2,000여명

과 연합하여 연변의 대전자령(大甸子嶺)에서 철수하는

일본군 수송부대를 매복 기습, 엄청난 군수물자를 빼앗

는 대승을 거두었다. 군수물자의 노획이라는 측면에서

이 전투는 독립전쟁 사상 최대의 전과를 거두었다.

이처럼 9.18사변 이후 조선혁명군과 한국독립군이 중국

의용군과 연대하여 일제 침략세력에 맞서 싸움으로써

당시 중국 동북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한인 교민들에 대

한 중국인들의 인식이 달라지고, 한인들의 독립운동을

지지·성원케 하는 의미있는 효과를 가져왔다.

이들 만주지역 독립운동 세력은 독립전쟁 전략에 따라

중국 관내와 일정한 연계를 유지하면서 긴밀한 연합전선

을 구축하는 한편, 대규모 국내 진입작전 및 대중조직을

결성하여 조선총독부 등 일본제국주의의 중추부를 섬

멸하고 국내에 거점을 갖추려는 원대한 전략을 구사하였

다. 1930년대 전반기 조선혁명군의 수십 차례 국내 진입

전투와 조선혁명군정부의 ‘조선내공작위원회’ 운영, 동북

인민혁명군 제1군의 평안북도 동흥(東興) 진입전투와 동

북항일연군 제2군의 ‘조국광복회’ 조직 결성, 보천보(普

天堡) 전투 등은 바로 그러한 사례라 할 수 있다.

양세봉 조선혁명군 독립군 총사령관 흉상(중국 요녕성 신빈현 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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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회보08

이념에 구애되지 않고 일본제국주의 세력에 대항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을 지낸 김구는 후일 1920~30년대 중국 동북지역의 민족

주의 계열 항일무장투쟁 조직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동북 3성의 정의·신민·참의부와 임시정부의 관계는 어떠하였던가. 임시정부가

처음 조직되었을 때, 3부는 임시정부를 최고기관으로 인정하고 추대하였다. 그러

나 그 뒤 3부가 할거하여 군정·민정을 합작하지 않고, 세력을 다투어 서로 전쟁

까지 하였다. (중략) 종전의 정의·참의·신민 3부중 참의부는 임시정부를 시종일

관 옹호·추대하였다. 그런데 3부가 통일하여 정의부(필자: 국민부의 오류)로 되자

서로 짓밟아 종막을 고하게 된 데에는 공산당과 민족당의 충돌이 중요한 요인으

로 작용하였다. 그리하여 공산진영이나 민족진영의 말로는 같은 운명으로 귀결

되었다.” 1)

김구는 공산당의 발호로 중국 동북지역에서 활발히 활동했던 민족주의 계열 독

립운동 단체들과 주요 인물들이 큰 타격을 받고 쇠퇴하게 되었다고 보았다. 그리

고 1920년대 중국동북지역의 유력한 독립운동 및 교민 자치조직이었던 정의부·

신민부·참의부, 특히 참의부가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독립운동의 최고 중추기관으

로 추대하고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고 회고하였다. 그러나 1929년 남만주 지역의

독립운동 통합조직으로 국민부(國民府)가 성립한 뒤부터는 임시정부와 연계가 차

단되고, 민족주의 계열과 공산주의 계열이 서로 대립하여 자멸한 것으로 인식하

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물론 김구의 이러한 인식은 중국동북지역과 멀리 떨어진 상하이(上海)에서 활동

했던 한계를 내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공산당에 대한 비판적 인식은 그

가 상하이 지역에서 겪었던 체험이 크게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사실 1929년 성

립한 국민부는 출범 초기 남만주 지역에 거주하는 한인 동포들을 기반으로 한 자

치정부를 표방하였다.

한편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중국공산당 만주지부 조직이 영도한 동북항일연군은

직접적 관계는 없었다. 그러나 김구는 『백범일지』에서 김일성 등의 동북항일연군

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정세로 말하면 東北 3성 방면에 우리 독립군이 벌써 자취를 감추었을 터이나, 신

01 김구(도진순 주해), 『백범일지』, 돌베개, 1998, 314~315쪽

조선혁명군 제2사 사령을 지내다

동북항일연군에 투신, 일제와 싸우다

전사한 최윤구 기념비

(중국 길림성 화전현 소재)

북한 압록강변에 남아 있는 일본 군경의

경비초소(왼쪽)

중국동북에서 활동한 항일세력의 막사

(밀영) 모습(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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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가을 09

흥학교 시절 이후 30여 년이 지난 오늘까지 오히려 김일

성(金一聲 : 북한 김일성을 지칭) 등 무장부대가 의연히

산악지대에 의거하여 엄존하고 있다. 이들이 압록·두만

을 넘나들며 왜병과 전쟁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중국의용

군과 연합작전을 하고 러시아의 후원도 받았기 때문이

다. 이렇게 현상유지를 하는 정세라, 관내 임시정부 방면

과의 연락은 극히 곤란하게 되었다.” 2)

이 내용을 검토하면 김구는 동북항일연군의 존재와 김

일성 등 재만한인의 활동상을 잘 알고 있었고, 일정한

연계를 도모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특

히 중국공산당 만주지부조직이 이끄는 항일유격대나 동

북인민혁명군, 동북항일연군의 편제를 모르고 단순히

‘중국의용군’이라고 표현하였으나, 중국 항일세력과 함께

연대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고 있던 사실은 잘 알고 있

었던 것이다. 또 이들이 이념을 같이하는 사회주의국가

러시아의 후원을 받고있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

만큼 중국 항일세력과 연대하여 싸운 다수 재만한인들

의 활동상은 이념에 구애되지 않고 일본제국주의 세력

에 대항해서 싸우는 ‘독립군’적 이미지로 부각되고 있었

던 것이다.

중국동북지역 독립군과 중국측과의 연대투쟁은

독립운동의 대표적 성과

1930년대 중국 동북지역 독립군의 중국측과의 연대투

쟁은 1920년대 독립운동을 심화·발전시킨 양상을 보였

고, 실제로 일제와 그 추종세력들을 상대로 거의 10여

년간 치열한 전투를 치러 상당한 손실을 주었기 때문

에 독립운동의 대표적 성과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우리

의 자존심과 정체성의 상징이며, 동시에 우리 민족이

8·15 해방을 주체적으로 맞이할 수 있었다고 하는 한

근거가 된다.

북만주에서 활동하던 한국독립군 출신 90여 명이 1933

년 말에서 1934년 초에 중국 관내(關內)로 이동하여 중

국군관학교에서 훈련을 받고, 나중에 한국광복군과 대

한민국임시정부 등에 합류한 사실은 주목된다. 특히 한

국독립군 사령관 출신 지청천(池靑天)이 한국광복군 총

사령관이 되고 조경한(趙擎韓)이 참모를 맡았다. 또 조

선혁명군 사령관을 역임한 이웅(李俊植)이 광복군 제1지

대장을 맡았으며, 역시 조선혁명군 참모장을 지낸 김학

규(金學奎)가 광복군 제3지대장을 맡았다. 이 사실은 만

주지역 항일무장투쟁 세력의 중요한 역할과 대한민국임

시정부와와 한국광복군으로의 이념과 인맥, 무장투쟁

론 등의 계승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최근 동아시아는 역사인식의 차이와 영토 갈등 문제 등

을 둘러싸고 민족주의 정서가 고조되고 있다. 하지만

극단적 민족주의 정서는 지양되어야 하며, 장기적으로

한·중·일 등 동아시아 3국은 평화적으로 공존·공영해

야 한다. 이런 점에서 1930년대 제국주의에 항거했던 동

아시아인들의 연대와 협력, 상생의 정신을 오늘에 되새

길 필요가 있다고 본다.

02 김구(도진순 주해), 『백범일지』, 돌베개, 1998, 315쪽

지청천이 이끄는 한국독립군이 점령했던 중국 흑룡강성 쌍성보(雙城堡)

서문(승은문)의 모습(최근 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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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회보10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40년 9월 중국 중경에서 한국광복군을 창설하였다. 임시

정부가 한국광복군을 편성한 궁극적 목적은 미국, 영국, 중국 등과 함께 2차대

전에 연합국의 일원으로 참전하여 일제를 상대로 전쟁을 벌여 승리함으로써 당

당한 전승국의 자격으로 독립을 쟁취하는 데 있었다. 한국광복군의 다양한 군

사활동을 전개했는데 인도·미얀마전선에 한국광복군 인면전구공작대(이하 공작

대)를 파견하여 영국군과 공동으로 군사작전을 전개한 것이 그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한국광복군 인면전구공작대(이하 공작대) 편성

필자는 2005년 가을 독립기념관의 해외독립운동 유적지조사사업의 일환으로 공

작대가 활동한 인도, 미얀마의 전적지를 답사할 기회가 있었다. 공작대가 1945년

해방과 더불어 철수한 이래 60년 만에 이루어진 전적지 방문이었다. 그 과정에서

그동안 피상적으로 알고 있던 임팔, 비센푸르 등 공작대가 활동했던 전장이 2차대

전사상 처절했던 임팔 대회전의 격전지 한 가운데 있었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

았다. 더불어 공작대가 겪었을 신산고초와 용맹분투가 생생하게 그려졌다.

공작대 파견의 선구는 인도 주둔 영국군사령부의 요청에 응하여 1943년 2월경 인

도전선에 공작원으로 파견되었던 조선의용대원 주세민과 최성오였다. 이들의 인

도 체류기간은 한 달 정도로 매우 짧았다. 생소한 기후와 풍토에 적응하지 못해

오래 머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활동을 계기로 총사

령부 안에 대적선전대가 특설되었을 정도로 두 공작원의 활약은 영국군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당시 이들은 주로 대적선무방송을 담당했던 것으로 보이며, 콜카

SPecial History ii

박민영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

연구소 선임연구위원

인도-미얀마 전선에서 활약한 한국광복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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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가을 11

중경의 한국광복군

총사령부에서는

체력이 강건하고

일본어에 능통한

대원 9명을 선발해

공작대를 편성하였다

타(Kolkata)에서 훈련을 받고 미얀마 서북부 해안의 아

라칸(Arakan) 전선에 투입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두 대원의 활약에 크게 고무된 인도 주둔 영국군총사령

부에서는 더 많은 인원을 증파해 줄 것을 요청해 왔다.

영국의 특수전 부대인 ‘SOE’(Special Operations Exec-

utive)의 동남아 담당 책임자였던 맥켄지(C. H. Macken-

zie, 1898-1986)의 요청에 따라, 중경의 한국광복군총사

령부에서는 체력이 강건하고 일본어에 능통한 대원 9명

을 선발해 다음과 같이 공작대를 편성하였다.

대장: 한지성(1지대)/ 부대장: 문응국(2지대)/ 대원: 최봉

진·김상준·나동규·박영진·송철·김성호(이상 2지대)·

이영수(1지대)

공작대원들 중국군사위원회에서 적응훈련 실시

공작대원들은 현지 파견에 앞서 중국군사위원회에서 3

주간 기본 적응훈련을 받았다. 중국 신일군(新一軍)의

신(新) 38사단의 대대장·사령부참모 등으로 미얀마에

파견되었던 최덕신도 이때 공작대원들과 함께 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교육을 마친 9명의 대원은 항공편으로

1943년 8월 29일 인도 콜카타로 갔다.

공작대는 영국군에 편제되어 대장 한지성이 대위, 나머

지 대원들은 중위 계급장을 달았다. 대원들의 증언과

현재 확인되는 단편적 자료들을 종합하면, 이들은 영

국 ‘SOE’의 인도전구, 곧 GSIK(일명 ‘Force 136’) 산하

의 ‘인도전지선전대’(IFBU; Indian Field Broadcasting

Unit)에 소속되어 있었던 것으로 인정된다. 시종일관 공

작대와 영국군간 연락업무를 맡았던 영국군 베어컨(R.

C. Bacon, 1904~1945) 대위의 소속이 SOE ‘Force 136’

의 ‘IFBU’로 확인되는 것도 이를 뒷받침해 준다.

공작대 임팔(Imphal) 전선에 투입

공작대원 9명은 1943년 9월부터 12월까지 4개월에 걸

쳐 콜카타와 델리의 영국군 기지를 오가며 특수공작전

과 대적선무방송 훈련을 받았다. 영어는 델리 외곽 가

지아바드(Ghaziabad)에 있는 ‘인그라함학교’에서 공부했

다. 대원들에게 영어를 가르친 이 학교의 교장 윌리엄(F.

E. C. Williams)은 충남 공주에서 35년간 선교사로 활

동하면서 1906년 영명학교를 세워 경영하던 인물로, 한

국말이 유창한 미국인이었다. 그리고 일본말 방송과 전

단작성, 문서번역 훈련은 델리의 영국군 기지인 레드 포

트(Red Fort)에서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훈련을 마친 대원들은 1944년 2월경 영국군에 분산 배

영국군과의 연합작전을 위해 인도·미얀마 전선에 파견된 한국광복군 인면전구공작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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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회보12

치되어 활동에 들어갔다. 델리의 영국군사령부에 남은 송철과 콜카타 방송국

에 배속된 이영수·최봉진을 제외한 6명의 대원은 대장 한지성의 인솔하에 임팔

(Imphal) 전선에 투입되었다. 임팔은 미얀마와 접경한 인도 마니푸르(Manipur) 주

의 주도로 영국군 제4군단(군단장 G. Scoones 중장) 사령부가 있던 곳으로, 이곳

을 중심으로 영국군과 일본군간의 2차대전 전사에서 분수령이 되는 임팔 대회전

이 벌어졌던 것이다.

임팔 대회전은 미얀마를 점령한 일본군이 1944년 3월 9일 대공세를 시작하여 7

월 15일 총퇴각할 때까지 4개월 동안 인도, 미얀마 국경지대에서 영국군과 대접

전을 벌인 것을 말한다. 이 전투에 투입된 일본군은 광기어린 무다구치(牟田口廉

也) 중장이 지휘하는 미얀마 주둔 제15군 휘하의 3개 사단을 비롯해 인도국민군

1개 사단 등이었으며, 영국군도 슬림(W. Slim) 중장이 지휘하는 제14군 예하 제

4군단 소속의 제17, 20, 23사단 등 3개 사단이 동원되었다. 영국과 일본 양군은

임팔을 중심으로 코히마, 비센푸르, 티딤 등지에서 대규모 격전을 벌여 피아간에

엄청난 사상자가 발생하였고, 특히 패전한 일본군측의 사상자는 무려 6만 5천명

에 이르렀다.

광복군 공작대는 이러한 임팔 대회전 당시 최전선에 투입되어 활약하였다. 이들

은 격전이 벌어지던 곳곳에서 대적선무방송, 투항권유 전단작성, 노획문서 해

독, 포로심문 등 다양한 공작전을 수행하여 큰 전과를 올렸다. 공작대가 활동했

던 전장으로 확인되는 곳은 임팔을 비롯하여 캉글라통비(Kanglatongbi), 우크룰

(Ukhrul), 비센푸르(Bishenpur), 티딤(Tiddim, 미얀마) 등지다. 이들 지역은 아라

칸(Arakan) 산맥의 험준한 산지로 열대 수림이 우거진 곳이다. 대원들은 이러한

악조건을 극복하고 영웅적인 공작전을 수행하였다. 이들은 일본군과 불과 2백 미

터 떨어진 최전선까지 들어가 대적선무방송을 하는 등 임팔 일대에서만 30여 회

에 걸친 선무방송과 10여 건의 포로심문, 문서번역 등의 공작전을 수행하였으며,

그 외 비센푸르, 캉그라통비, 우크룰 등지에서도 4월 하순부터 6월 초에 이르기

까지 역시 선무방송 등의 공작전을 통해 영국군의 작전을 기민하게 원조하고 있

었다. 특히 임팔 남쪽 비센푸르에서는 4월 하순경 일본군 2개 대대 650명을 대상

으로 한 선무방송을 비롯해 노획문서 해독을 통한 일본군의 작전계획, 무기·병

력 배치상황 탐지, 그리고 무선도청과 암호해독 등 다양한 방면에서 큰 전과를

올렸다. 이에 영국군 사단장이 직접 공작대를 찾아와 감사의 뜻을 전했고, 또 공

작대의 건의를 받아들여 일본군 포로를 다시 선무방송에 투입하여 큰 성과를 거

두었다고 한다.

임팔 대회전에 참전한 공작대의 활동 가운데서도 단연 두드러진 것은 대원의 활

영국군 제17사단장 코완(D. T. cowan)

소장. 이 사단은 광복군 공작대원들의

활약으로 일본군 포위망을 벗어날 수

있었다

임팔 영국군사령부

캉글라 포트(Kangla Fort) 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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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가을 13

약으로 포위망에 갇힌 영국군 1개 사단을 구출한 일이

다. 개전 초기 대원들은 영국군 제17사단(사단장 D. T.

Cowan 소장)을 따라 임팔을 떠나 3월 11일 미얀마 영내

의 티딤까지 깊숙이 진격해 들어갔다. 그러나 영국군은

일본군 제33사단의 역공 포위망에 완전히 걸려들고 말

았다. 당시 포위작전에 참여했던 일본군의 한 소대장(鹽

坪辰實)은 영국군 17사단을 ‘자루 속에 든 쥐’로 표현했

을 정도였다. 급기야 14일에는 전원 철수명령이 하달되

었으나, 일본군의 포위망에 갇혀 퇴로를 확보할 수 없어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이러한 위기상황에서 문응국 등

의 대원들은 노획한 작전문서를 해독, 분석하여 일본군

의 병력 배치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게 되었고, 이 정보는

영국군 제17사단 전원이 임팔로 무사히 귀환하는 데 결

정적 역할을 하게 되었다. 대원들의 활약으로 결국 영국

군 1개 사단 병력을 구출한 것이다.

이에 영국군 사단장은 공작대를 직접 찾아와 감사의 뜻

을 전했고, 영국 전지신문이 이들의 활동상을 취재하여

대원들의 사진과 함께 “한국광복군은 중국 경내에서 성

립하였고, 그 중 약간을 인도에 파견하여 연합국과 어깨

를 겨누어 작전하며 공동의 적을 치고 있다”라는 기사

를 실었다고 한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현재 이 신문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

공작대 영국군 미얀마 탈환작전에 동참

임팔 대회전 이후 공작대는 영국군의 미얀마 탈환작전

에 동참하였다. 이들은 오늘날의 방글라데시 남동부 해

안도시 치타공(Chittagong)으로 이동한 뒤, 1945년 초

영국군 전투부대에 분산 배속되어 미얀마로 들어갔다.

새로이 파견된 안원생이 동남아전구사령부에 배속된 외

에 한지성, 박영진, 김성호 대원은 미얀마 중북부에서

만달레이(Mandalay)로 향해 남진하는 부대에, 최봉진,

김상준, 이영수는 미얀마 중부지역을 우회하여 만달레

이를 향해 북상하는 부대에, 그리고 문응국, 송철은 미

얀마의 수도 양곤(Yangon, 구 랭군) 상륙작전에 참전

한 것이다.

영국군에 배속되어 미얀마 내륙으로 진격한 공작대는

1945년 4월 초 미얀마 중부의 요충지인 만달레이 전투에

참전하였다. 하지만, 자료부족으로 미얀마로 진군한 광

복군 공작대의 구체적인 활동과정이나 전과에 대해서는

확인할 수 없는 실정이다. 다만, 영국군 연락장교로 대

원들과 생사고락을 함께 했던 베어컨 대위가 애석하게도

이 전투에서 전사하게 되어 대원들이 큰 슬픔을 당하였

다. 그는 현재 양곤 북방의 턱잔 영국군 묘지(Taukkyan

War Cemetery)에 잠들어 있다.

미얀마 탈환작전이 종료된 후 공작대는 인도 콜카타로

철수하였고 그곳에서 꿈에 그리던 조국광복을 맞이하

였다. 인면공작대의 작전수행 및 업무처리 능력을 깊이

신뢰하던 영국군 동남아전구사령부에서는 전후 포로처

리 문제 등에 협조해 줄 것을 요청해 왔다. 하지만, 공

작대는 일제가 패망하고 전쟁이 종료된 상황에서 한국

광복군총사령부로 복귀하여 새로운 임무를 부여받아야

할 입장이었기 때문에 중경으로 귀환하지 않을 수 없었

다. 그리하여 광복군 공작대 9명 전원은 1945년 9월 10

일 콜카타에서 중경으로 무사히 귀환함으로써 임무를

완수하였다.

인도, 미얀마 전구에 투입된 공작대원의 숫자는 고작 9

명(교체인원 제외)에 지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년간에 걸친 이들의 활약은 전과 면에서나 역사적으로

큰 의미가 있다. 공작대원들이 비록 영국군에 배속되어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들의 신분은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서 편성한 한국광복군이었다. 그러므로 공작대가 자신

들의 소임으로 자각하고 있던, 연합군의 일원으로 편제

되어 일제 구축을 통한 조국광복의 신념을 철저하게 구

현하였던 것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영국군 1개 사단을 구출했던 전공은 결코 간

과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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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회보14

1919년 중국 상해에서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처음부터 일본에 대한 대규모

정규전의 전개를 지상목표로 설정하고 활동하였다. 다만 이러한 목표의 실천은

중국 영토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객관적인 이유, 나아가 광범위한 대중적 토대의

결여 등 여러 가지 요인으로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1940년 9월, 임시정부 산하

에 국군으로 한국광복군이 창설되면서 이러한 과제를 실천에 옮길 수 있는 바탕

이 마련되기에 이르렀다.

미국을 비롯한 연합군을 대상으로 전시참전외교 전개

광복군은 처음부터 연합군의 일원으로서 대일전에 참가한다는 목표를 설정하고

이를 실천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먼저 임시정부는 그 동안의 중국 국민당정부

일변도의 외교에서 벗어나 미국을 비롯한 연합국을 향하여 적극적인 임시정부 승

인 및 전시참전외교를 전개하였다.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 발발 후, 임시정부는

연합국 특히 태평양전선에서 일본군을 격파하면서 북상하고 있는 미국과의 합작

을 중시하였다. 임시정부는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 미국 정부 혹은 주중 미군사령

부에 한인의 대일전 참여를 지속적으로 제의하였다. 태평양 전선을 주도하고 있는

미국과의 합작은 임시정부 및 광복군의 명운을 결정짓는 중요한 사안이 될 수 있

었다. 1945년에 접어들면서 미군의 필리핀 점령, 특히 6월 말 오키나와 점령으로

임시정부 요인들은 연합군의 한반도 상륙작전이 임박했음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임시정부는 광복군을 태평양지역에서 북상하고 있는 미군에 파견하여

한반도 상륙작전시 배합하고자 시도하였다. 김구 주석은 미국 정부에 미군이 제

주도를 점령하면 그곳에서 모든 한국인들을 지도하여 대일전에 협조할 것을 제의

SPecial History iii

김광재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

미국 OSS와의 공동작전을 전개한 한국광복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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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가을 15

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제의는 임시정부 및 광복군이 오

랫동안 지향해왔던 ‘독립전쟁’을 전개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한편 미국 정부도 태평양전쟁 발발 직후부터 이전의 한

국 문제 ‘불제기’ 원칙을 폐기하고 한반도 문제에 깊은 관

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미국 정부는 일본패망 후 한반

도에 신탁통치를 실시한다는 정책을 일찍부터 구상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미국 정부는 해외의 한인독립운동

세력, 특히 중국 내의 임정, 또는 미국 내 한인독립운동

세력의 대일전수행에의 참여 가능성에 주목하고, 이들

의 동향을 파악하기 시작하였다.

중국에 진출해 있던 미국 OSS(Office of Strategic Ser-

vice ; 전략첩보국)도 한국으로의 첩보침투를 목표로 하

여 광복군과의 합작을 서둘렀다. 사실 OSS는 태평양전

쟁 발발 직후부터 중국에 진출, 화북·만주·한국을 거

쳐 최종적으로 일본에 첩보요원을 침투시키고자 노력하

였다. ‘일본제국’의 어디든지 갈 수 있는 유일한 ‘비일본

인’으로서 한인들이 그 임무에 가장 적합하다고 인식한

OSS는 태평양전쟁 초기부터 대일첩보활동에 한인들을

동원하려는 여러 가지 계획을 세워 실행에 옮기고자 시

도하였다. 이러한 속에서 하루빨리 한반도로 침투하여

적정보를 수집하고 적후방을 교란하여 연합군의 상륙에

배합하려는 광복군과 OSS는 서로의 전략적 이해관계

가 일치하게 되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광복군과 OSS의 교섭은 급물살

을 탔다. 1945년 4월 1일, 군사합작에 대한 최종적인 정

리를 위해 양측의 회합이 이루어졌다. 광복군측에서 지

청천, 이범석 등, OSS측에서 싸전트(Clyde B. Sargent)

가 참석하여 군사합작에 대한 문제를 논의하였다. 싸전

트는 “앞으로 실행될 한미 합작이 모든 한국인 지도자

들과 단체들의 지지를 받기를 원한다”고 하였다. 이에

대해 이범석은 “기획된 작전들에 관해 대한민국정부는

아무 문제가 없으며 전적으로 작전에 따르겠다”고 언급

하였다.

이어 4월 3일 아침 싸전트가 임시정부 청사로 김구 주석

을 방문하였다. 이 자리에는 지청천 사령관, 이범석 제2

지대장, 김학규 제3지대장, 정환범 고문(통역)이 참석하

였다. 김구 주석은 한미공동작전에 대해 최근 중경에 도

착한 37명의 한국청년을 포함한 가용인력을 확보할 것

을 약속하는 등 전적인 협조 의사를 표명하였다. 나아

가 “이범석 장군과 싸전트와의 관계에서 파생되는 모든

것을 승인한다”고 하여 광복군과 OSS의 군사합작을 최

종적으로 승인하였다. 그리하여 광복군은 OSS와 합작,

광복군을 훈련시켜 한반도에 있는 일본군에 투입하여

정보수집과 게릴라활동을 전개한다는 ‘독수리작전’(The

Eagle Project)이 가동되었다.

1945년 5월 한미공동훈련 시작

임시정부 및 중국전구 미군총사령부의 최종적인 승인

하에 1945년 5월부터 서안(西安) 두곡(杜曲)의 광복군

한국광복군 훈련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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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회보16

제2지대에서 한미합작훈련이 시작되었다. 광복군 제2지대 본부에 한미합동지휘

본부를 설치하고 이범석과 싸전트가 양측의 지휘관으로서 긴밀한 공조체제를 유

지하였다. 합작훈련 제1기 훈련생으로는 한인 학병출신들과 기존의 광복군 제2지

대 대원들에서 50명의 적격자들이 선발되었다. 주된 훈련내용은 장차 한반도에

침투해서 적의 중요군사시설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다시 이를 무전으로 중국

에 타전하기 위한 첩보훈련과 통신(무전)훈련이었다. 그 밖에 일본에 대한 심리전

기술, 연합군의 공중폭격이나 상륙작전을 전개하기 위한 기초작업으로서 기상학

교육도 강조되었다. 엄격하고 강도높은 훈련이 진행되면서 50명 가운데 12명은 부

적격자로 판정되어 탈락하고 8월 초 38명이 약 3개월 과정의 훈련을 수료하였다.

서안의 광복군 제2지대의 제1기생 훈련이 끝난 직후인 8월 5일, 김구·지청천·엄

항섭 등 임시정부 및 광복군 수뇌부로 구성된 시찰단은 서안에 가서 훈련생들을

사열하고 격려하였다. 8월 7일 김구는 마침 서안에 와 있던 워싱턴의 OSS 총책

임자인 도노반(William J. Donovan)과 한미공동작전을 위한 회담을 개최하였다.

이 자리에서 김구와 도노반은 한미공동작전에 지대한 관심을 표명하고 작전의 조

속한 실행에 합의하였다. 김구는 회담 후 미국 대통령 트루먼에게 장문의 서신을

보내 지속적인 한미합작을 요청하였다.

광복군, ‘정진대’의 국내파견 추진

8월 9일, 김구가 머물고 있던 서안 일대에 일본이 곧 항복한다는 소문이 퍼졌다.

조국 광복 후 서울 여의도에 도착하였던 한국광복군 국내정진대 대원들(1945. 8. 18)

서안(西安) 한국광복군 제2지대에서

국내진입작전을 합의한 미국 oSS 책임자

도노반과 백범 김구 선생 (1945.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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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가을 17

이날 밤 서안 두곡 제2지대 본부에서 지청천·이범석 등

광복군 수뇌부는 미군의 한반도 상륙시 광복군도 투입

한다는 국내진입작전 계획을 수립하였다. 광복군이 추

진하였던 국내진입작전은 일본이 무조건 항복함으로써

미처 구체화되지 못하였다. 즉 8월 9일 서안에서 일본의

항복 소식을 접한 김구는 “천신만고로 수년간 애를 써서

참전할 준비를 한 것도 다 허사다”라고 탄식하였다. 비록

광복군은 실전에 투입되지 못하였지만 한미공동작전 대

원 및 제2지대 대원을 중심으로 약 100명에 달하는 광

복군 ‘국내정진군’을 편성하여 한반도 진입을 서둘렀다.

국내정진군의 총지휘관에는 이범석이 임명되었으며, 이

하 각 도별로 반장 이하 각 조별 모두 94명의 인원으로

편성되었다. 이들의 임무는 국내 질서 유지, 일본군 무기

접수, 임시정부의 귀국을 위한 기반을 조성하는 것이었

다. 그러나 국내정진군의 파견은 여러 가지 사정으로 말

미암아 실현되지 못하였다. 대신 임시정부 및 광복군에

서는 국내정진군의 ‘선발대’라고 할 수 있는 ‘정진대’의 국

내파견을 추진하였다.

광복군 정진대와 OSS측이 국내진입을 시도한 것은 일

제의 정식항복선언이 있은 다음날인 8월 16일이었다. 독

수리팀을 태운 비행기가 서안을 출발하여 한반도로 향

하고 있을 때, 일본의 가미가제특공대가 아직도 연합군

을 공격하고 있다는 정보를 무전으로 입수하였다. 그 결

과 독수리팀 일행은 기수를 돌려 다시 서안으로 돌아가

지 않을 수 없었다. 또다시 국내진입을 시도한 것은 이

틀 후로 서안을 출발, 8월 18일 12시경에 여의도 비행장

에 착륙하였다.

그러나 해방 직후의 국내 상황은 이들이 서울시내로 진

입하여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여건이 되지 못하였다.

해방 직후 조선총독부는 여운형의 건국준비원회에 상

당한 권력을 이양하는 등 타협정책을 추진하였지만 일

본군 강경파는 한인에 유화적인 총독부를 비판하고 한

인에 대한 무력통치를 오히려 강화하고 있었다. 광복군

정진대가 여의도 비행장에 도착한 것은 바로 이러한 시

점이었다.

한국광복군 정진대 및 OSS팀이 여의도 비행장에 착륙

하자 이들을 맞이한 것은 무장한 일본군이었다. 일본군

은 착륙 즉시 이들을 포위하고 서울 진입을 허용하지 않

았다. OSS측의 총책임자인 버드(Willis Bird) 대령이 사

절단의 임무와 성격을 설명하고, 아베(阿部)총독에게 이

를 전달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측은 본국

으로부터 어떤 지시도 받지 못했으므로 중국으로 돌아

갔다가 일본이 정식으로 항복한 이후에 다시 오라고 하

였다. 8월 18일 서울 여의도비행장에 도착한 광복군 정

진대와 미군사절단은 일본군의 위협으로 다음날 8월 19

일 어쩔 수 없이 중국으로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즈음 한국이 중국전구 관할에서 태평양전구로 변경되고

미군이 곧 한반도에 상륙하게 됨으로써 광복군이 공식

적인 임무를 띠고 다시 한반도에 들어갈 수 있는 기회는

사라지게 되었다.

자주적 독립과 민족해방을 위한

투쟁 높이 평가해야

국제적으로 광복군은 태평양전쟁에서 연합군의 일원으

로 참전하여 대일전쟁을 전개함으로써, 전후에 교전단체

의 지위를 획득한다는 전략을 수립하였다. 광복군이 인

도·버마전선에 공작대를 파견하여 영국군과 함께 대일

작전을 수행한 것이나, 미국의 OSS와 합작하여 공동작

전을 추진한 것은 그러한 시도였다. 이와 같이 광복군은

열강이 임시정부를 외면하는 불리한 상황에서도 연합군

의 일원으로 대일전에 참전하려고 노력하였으며 나아가

국내진입작전을 시도한 것은 그것의 규모나 실현 여부를

떠나 조국의 독립과 민족의 해방을 자주적으로 쟁취하

려는 자주적 독립의지로 높이 평가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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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회보18

항저우는 저장성(浙江省)의 성도로서 인천공항에서 매일 직항이 있으며, 상하이

에서 철도나 고속도로를 이용하여 2시간 이내에 이동할 수 있는 곳이다. 이곳은

남송시대의 수도로서 소동파(蘇東坡)의 고사가 전해지며, 그가 좋아하였다는 오

겹살 돼지 찜요리인 동포러우(東坡肉)가 건륭제의 고사가 담긴 거지 닭과 함께 지

역 명물중 하나이다. 이곳의 명소인 서호(西湖) 부근에는 남송의 충신인 악비(岳

飛)의 묘가 있고, 고려 의천이 화엄경을 배웠다는 고려사(高麗寺)가 한·중 문화교

류의 상징으로 복원되어 있다. 항저우는 ‘상유천당 하유소항(上有天堂 下有蘇杭:

ouTSiDe FoCus

대한민국임시정부 장정(長程)의 첫 기착지, 항저우(杭州) 중국에서의 대한민국임시정부 활동과 백범 김구의 발자취 III

박걸순충북대 교수·한국근현대사

항저우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의 복원된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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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가을 19

하늘에는 천당이 있고 땅 위에는 쑤저우와 항저우가 있

다)’이라는 말이 있듯이 경관이 빼어나며, 용정(龍井) 차

의 주산지로 유명한 곳이다.

8년 장정의 첫 기착지

윤봉길 의거 직후인 1932년 5월, 임시정부는 항저우로

이동하여 이후 1935년 11월경까지 약 3년 반을 머물렀

다. 그러나 김구와 임시정부 요인 및 그 가족들은 중국

국민당의 협조를 받아 항저우가 아니라 일제의 첩보망

을 피할 수 있는 자싱(嘉興)을 거점으로 생활하였다(본

보 2013년 여름호, 「백범의 피난처, 자싱」 참조). 1932년

5월 10일, 임시정부 군무부장 김철이 먼저 상하이를 떠

나 항저우에 와서 청태제이여사(淸泰第二旅社) 32호에

청사를 꾸렸다. 5월 14일에는 재무부장 김구가 와서 취

영여사(聚英旅社)에 머물렀다. 이어 이동녕·조완구·조

소앙 등 임시정부 요인들도 속속 이곳에 도착하였다. 임

시정부와 함께 여당인 한국독립당도 이전해 왔다. 한국

독립당은 학사로 사흠방(思鑫坊)에 사무소를 두었는데,

이곳에서 기관지 「진광(震光)」을 발행하였다.

항저우로 옮긴 임시정부는 5월 15일과 16일, 청태제이

여사 청사에서 국무회의를 열고 향후 활동 방향을 모

색하였다. 이 회의에서 김구와 김철은 재무부장과 군무

부장 자리를 맞바꿨다. 그런데 이 회의에서 중국 측이

제공한 지원금 문제를 둘러싸고 분쟁이 일어났다. 김구

는 이듬해 3월 22일의 국무회의에서 군무부장에서 해

임되었다. 이후 김구는 한동안 임시정부와 소원한 관계

를 유지하였다.

임시정부 최대의 시련을 겪다

항저우 시기,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최대의 시련에 봉착하

였다. 일제의 탄압도 주요 원인이나, 그보다는 김구와 임

시정부의 사이가 소원해지며 임시정부를 이끌 지도력의

공백이 생긴 것이 심각한 문제였다. 윤봉길 의거는 김구

가 독립운동계는 물론 중국으로부터 새로운 인물로 주

목 받는 계기가 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임시정부 내부에

서 역학관계의 변화가 초래되었고, 김구는 경쟁세력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세력화를 도모하였다.

그 구체적 발단이 된 것이 이른바 ‘항주사건’이다. 윤봉

길 의거 직후 김구의 명성이 높아지고, 중국인의 성금이

그에게 답지하자 교민들 사이에서 이를 둘러싸고 의혹

이 불거졌다. 즉, 교민단장 이유필 등이 김구가 어려움에

처한 교민들을 외면하고 있다고 비판한 것이었다. 그러

나 이는 사실이 아니었다. 『백범일지』에 의하면, 김구는

이 돈을 피체된 동지를 구하기 위한 변호사 비용과 나

머지 가족의 생계비용, 그리고 다른 동지들의 도피 비용

등에 사용하며 온갖 성의를 다하였음을 알 수 있다. 오

히려 김구는 상하이 상회(商會)가 피체된 가족들에게 주

라며 위로금으로 전달한 돈을 김철과 조소앙이 착복했

다는 소문을 듣고 그들을 의심하였다. 결국 국무회의에

서 양측의 비난과 질책만 난무하자, 김구는 이동녕과 함

께 자싱으로 떠나버렸다. 그 얼마 후 상하이로부터 박창

세·문일민 등이 항저우 청사로 들이닥쳐 권총으로 김철

과 조소앙을 위협하여 그들이 가지고 있던 돈을 모두 빼

앗아가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김철과 조소앙은 그 배후

에 김구가 있다고 의심하였다. 이로 인해 양측의 관계는

항저우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의 복원 전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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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회보20

더욱 나빠졌고, 김구는 임시정부와 거리를 둔 채 독자적인 행동을 하였다. 1933년

봄, 김구는 안공근·엄항섭·박찬익과 함께 남경 중앙육군군관학교에서 장개석과

회담을 하였다. 이 자리에서 장개석은 김구의 자금 지원 요청과 특별교육과정으

로서 한인특별반 개설을 수락하였다. 한인특별반의 정식 명칭은 중국중앙군관학

교 낙양분교로서, 김구는 여기의 졸업생을 중심으로 특무 조직을 운영하였다. 이

조직은 이후 김구가 임시정부에 복귀한 뒤 그 자신의 정치적 위상을 강화함은 물

론 임시정부의 항일투쟁 역량을 강화하는 데 큰 힘이 되었다.

한편 1935년 7월, 조선민족혁명당의 창당을 앞두고 국무위원이 단일당 조직에 참

가하려면 직무를 포기해야 한다는 의론이 제기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조소앙·최

동오·유동열·양기탁 등이 사직하고 각자의 길을 가고, 임시정부는 ‘사수파’인 송

병조와 차리석 단 둘만 남게 되었다. 임시정부가 사실상 공중분해 된 위기를 맞

이한 것이다.

김구, 임시정부로 복귀하다

김구가 임시정부의 운영에서 물러나 피난생활을 하고 있는 사이, 의열단·재만 한

국독립당·한국독립당 내의 일부 세력 등이 반임시정부를 표방하며 새로운 독립

운동 정당 창당을 위한 과도기구로서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을 가동하고 있었다.

그들은 김구에게도 신당에 동참할 것을 권유하였다. 통일동맹에서는 윤기섭이, 의

열단에서는 김원봉이 김구를 찾아와 설득하였으나 김구는 단호히 반대하였다. 김

구는 1935년 5월 9일 임시의정원 의원들을 대상으로 발표한 성명서를 통해 자신

의 입장을 밝혔다. 그는 이 성명서에서 자신은 임시정부로부터 특위(特委)의 임무

를 부여받아 충성을 다하여 사명을 완수하려 노력하였다고 전제하고, 명분과 실

제가 일치하지 않는 대당(大黨) 조직의 미명을 가지고 임

정이라는 법인의 해소를 시도하려는 것은 부당하다고 공

박하였다. 또한 우리 국민들은 임시정부를 성심으로 받들

어야 할 의무가 있다고 강조하고 자신은 앞으로도 임무를

다하여 임시정부의 책임을 다할 것임을 천명하였다. 김구

가 발표한 성명서의 일부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 … 한족(韓族)의 피를 갖고 국권과 국토를 광복하려는

한인은 모두 임정을 성심으로 받들어야 할 의무가 있다.

우리 정계에는 세상에서 보기 드문 나쁜 예가 있다. 자기

가 필요해서 임정의 직원이 되었다가도 개인 의사에 불만

이 있을 때에는 헌신짝처럼 벗어 던지고 반역을 도모함백범 김구 선생과 장개석의 회담 장면(기록화, 백범김구기념관 소장)

1935년 11월, 김구가

국무위원으로

임시정부 운영에

복귀하며

임시정부는 그간의

침체국면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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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가을 21

이 한둘에 그치지 아니하였다. 지금 여러분은 김구 또

한 그런 의리 없고 믿음이 없는 무리로 간주하는가? …

나는 결코 민족통일을 반대하지 않고 진정한 통일을 요

망한다. 그러나 위임받은 특무의 본의를 수행할 것을 미

리 말하여 둔다. …”

그가 말한 ‘위임받은 특무’란 한인애국단 명의 하에 결

행한 이봉창·윤봉길 의거를 지칭한 것이다. 이처럼 김

구가 임정 수호의 명분 아래 신당 창당론자들을 비판하

고 임시정부에서 자신의 임무에 충실할 것을 성명한 것

은 윤봉길 의거 이후 소원했던 임시정부로의 복귀를 선

언한 것이었다. 1935년 11월, 김구가 국무위원으로 임시

정부 운영에 복귀하며 임시정부는 그간의 침체국면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 것이다.

항저우의 독립운동 유적지

항저우시기 임시정부는 청태제이여사에 잠시 청사를 꾸

렸다가 곧 중국 국민당의 도움으로 장생로 호변촌(湖

邊村) 23호로 청사를 옮겨 1935년 11월까지 사용하였

다. 이후, 11월 28일에는 판교로 오복리(五福里) 2가 2

호로 청사를 이전하였다가 얼마 후 남경 부근인 진강

(鎭江)으로 옮겼다.

청태제이여사의 현주소는 인화로 22호로서, 군영반점

(群英飯店)이라는 상호를 내걸고 항저우시 인민정부

가 관할하는 여관 겸 음식점으로 사용되었으나 최근에

‘한정연쇄주점(漢庭連鎖酒店)이라는 상호를 내걸고 쾌

첩(快捷, 익스프레스) 호텔 영업을 하고 있다. 건물의 외

부는 원형이 크게 훼손되었고, 내부도 크게 개변되었으

나 일부 기둥과 벽체 등에서는 당시의 흔적을 엿볼 수 있

다. 건물의 입구에는 저장성 인민정부가 2005년 이 건물

을 성급(省級) 문물보호단위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음

을 알려주는 표지석이 서있다. 호변촌 23호 청사는 3층

의 목조 건물로서 원형을 거의 간직한 채 연립주택으로

사용되다가 2007년 항저우시정부가 주민들을 모두 이주

시킨 뒤 복원 공사를 마치고 ‘대한민국임시정부항저우구

지기념관’으로 개관하였다. 복원과 전시는 한국의 독립

기념관과 중국의 저장대학 한국연구중심이 맡아 진행하

였다. 내부는 회의실·사무실·침실 등 당시대로 복원하

였으며, 저장지역을 중심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역사

를 전시한 전시관도 마련하였다. 호변촌 청사는 2012년

내부 수리 공사와 전시 교체를 하여 재개관을 하였다.

임시정부 요인과 가족이 거주하였던 오복리 2가 2호는

비교적 원형을 보존한 채 중국인이 거주하고 있다. 사흠

방에 자리했던 한국독립당 사무소는 당시의 모습은 전

혀 없고 자리만 확인되는 정도이다.

청태제2여사(靑泰第二旅社)(군영반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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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회보22

1948년 10월 26일 백범 김구 선생은 안중근 의사의 의거 38주년을 기념해 친필 휘

호를 남겼다. 선생은 평소 아껴 외우던 한시 한 수를 썼다. 그 시는 이렇다.

눈밟고들판갈제 踏雪野中去

어지러이가지말라. 不須胡亂行

오늘의내발자취 今日我行跡

뒷사람의길되리니. 遂作後人程

눈 쌓인 순백의 들판 위로 첫 발자국을 찍으며 걷는다. 길은 지워져 잘 보이지 않

는다. 걷다가 뒤돌아보니 내 발자국이 나를 따라왔다. 비뚤빼뚤 어지럽다. 매서운

바람이 내 얼굴 위로 눈보라를 날린다. 아직도 가야할 길이 멀다. 나는 정신을 가

다듬는다. 내 발자국을 따라 내 뒤에 올 누군가가 있다. 내가 눈길을 헤매 돌면

그도 덩달아 헤맬 것이다. 나는 문득 책임감을 느낀다. 어지럽지만 똑바로 걷겠다.

내가 내는 첫길을 무작정 믿고 따라올 그가 길 잃고 방황하는 일이 없도록.

거룩한 뜻이요 갸륵한 마음씨다. 백범 김구 선생은 이 시를 특별히 아껴 1948년

남북회담을 위해 38선을 넘을 때도 이 시를 읊었다고 한다. 김대중 전 대통령도

이 시를 즐겨 휘호하곤 했다. 시에서 미답(未踏)의 새 길을 걷는 지사(志士)의 다

짐을 읽었기 때문이다. 이 시는 그간 서산대사(1520~1604)의 선시(禪詩)로 알려

져 왔다. 하지만 불승의 선시와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고, 그의 문집 『청허집(淸虛

集)』 에도 막상 이 시가 없다. 문집에 실리지 않았을 뿐이지 그래도 입으로 전해오

시선집중

정민한양대 국문과 교수

백범 김구 선생이 내신 곧은 길을 따라 오늘 우리가 걷는다백범 김구 선생이 1949년 남북협상을 위해 삼팔선을 넘으면서 읊었던 시로, 절대 부끄럽지

않은 길을 가겠다는 신념이 담긴 답설시는 그동안 서산대사의 선시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최근 한양대 국문과 정민 교수는 이 시가 조선후기 뛰어난 시인 이양연의 시라고 주장한다.

무엇 때문에 잘못 알려지게 되었는지 그 자료와 근거를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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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가을 23

던 시려니 다들 믿었다.

이양연(李亮淵, 1771-1853)은 조선 후기의 뛰어난 시인

이다. 그의 시는 제대로 수습되어 정본으로 간행되지 못

하고 여러 갈래로 전승되어 왔다. 서울대 규장각에 소장

된 필사본 『임연당별집(臨淵堂別集)』도 그 가운데 하나

다. 그의 다른 필사본 시집과 수록 작품에 상당한 출입

이 있다. 이 시집 둘째 면에 「야설(野雪)」이란 제목 아래

늘 보던 익숙한 시가 실려 있다. 그 시는 이랬다.

눈길뚫고들판갈제 穿雪野中去

어지러이가지말라. 不須胡亂行

오늘아침내발자취 今朝我行跡

뒷사람의길되리니. 遂作後人程

위의 시와 다 같은데 1구의 ‘답설(踏雪)’이 ‘천설(穿雪)’로

바뀌었고, 3구의 ‘금일(今日)’이 ‘금조(今朝)’로 달라졌다.

천설은 현재 눈이 펑펑 내리는 상황에서 눈발을 뚫고 들

가운데로 간다는 의미라 좀더 비장미가 있다. 답설이라

할 때는 현재 눈은 그친 상태다. 또 금일 보다는 금조가

더 낫다. 여관에서 밤을 보낸 나그네가 이른 아침에 눈보

라 치는 들판으로 하루 길을 나서는 상황이다. 앞의 시

가 정태적인데 반해 뒤의 시는 두 글자 차이로 더 역동

적이다. 위는 하얀 눈 위에 발자국을 찍으며 밝은 날에

가는 길이고, 아래는 눈보라의 역경을 헤치며 새벽길을

나서는 행동이다. 그렇다면 서산대사의 시로 알려진 이

시는 이양연의 것이 분명하다. 이양연이 서산대사의 시

를 두 글자 바꿔놓고 제 시라고 우겼을 수는 없다. 더구

나 서산대사 관련 문헌에서 이 시는 눈 씻고 봐도 보이

지 않는다. 구한말 장지연이 엮은 『대동시선(大東詩選)』

권 8에도 이 시는 이양연의 작품으로 버젓이 올라 있으

니, 사실 더 이상의 긴 논란이 필요 없다. 여기서는 ‘적

(跡)’을 ‘적(迹)’으로 쓴 것만 다르다. 전자가 맞다.

그렇다면 어째서 이것이 서산대사의 시로 잘못 알려졌

을까? 누군가의 기억 착오에서 비롯된 것이 그 내용으

로 주목 받았고, 백범 같은 큰 어른이 즐겨 쓰시는 통

에 통설로 굳어졌다. 이런 일은 “청산은 나를 보고 말

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하네”로

알려진, 나옹화상의 작품으로 전해지는 정체불명의 시

도 마찬가지다.

뿐만이 아니다. 이양연은 『임연당별집』의 바로 이어지는

글에서 「우(又)」라고 쓰고 비슷한 의경으로 시 한 수를

더 남겼다.

눈온아침에들길을가니 雪朝野中行

길을여는것나로부터라. 開路自我始

감히함부로못삐뚤댐은 不敢少逶迤

뒤에올사람그르칠세라. 恐誤後來子

뜻은 같고 운자만 다르다. 새벽녘에 들판에 나선다. 밤새

쌓인 눈이 길을 지웠다. 순백의 도화지 위에 새 길을 내

며 걷는다. 이 길은 나로 말미암아 시작되는 길이다. 감

히 조금이라도 걸음을 흐트러뜨리겠는가? 내가 이리저

리 헤매 걸으면 내 발자국을 기준 삼아 내 뒤를 따라올

후래자(後來子) 들도 덩달아 길을 잃고 헤맬 것이 아닌

가? 새벽 눈 쌓인 들판을 걷다가 그는 갑자기 조심스러

워진 걸음 끝을 가다듬는다.

역사 앞에 선 개인은 새벽 눈보라를 뚫고 먼 길을 떠나

는 나그네와 같다. 암담한 현실에서 갈 길이 보이지 않

는다. 그렇다고 함부로 무책임하게 행동할 수 있겠는가?

나의 일거수일투족은 역사의 눈길 위에 자취를 남긴다.

선구자의 길에는 책임이 뒤따른다. 되는대로 되겠지, 어

떻게 되겠지는 안 된다. 흐린 시계(視界) 앞에서도 정신

을 똑바로 차리고 뚜벅뚜벅 걷는다.

간난의 역사를 앞장서서 뚜벅뚜벅 걸어간 거인! 백범 김

구 선생이 내신 곧은길을 따라 오늘 우리가 걷는다. 그

형형한 정신을 따라가기에 길 잃고 헤맬 염려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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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회보24

시대의 부름에 성실하게 응답하다

“나는 스스로 조국 독립을 위한 항일투쟁의 선봉에 나섰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

다. 그럴 만한 능력도 자질도 없는 사람이고, 그저 평범한 여느 아낙네와 다를 바

없는 사람이었다. 다만 사람은 시기와 분수에 맞추어 살아야 한다는 말을 곧이

곧대로 믿고 그대로 따르는 사람일 뿐이었다. 내가 살고 있는 시대의 상황이 나로

하여금 임시 망명정부의 저 구석자리 하나를 차지하게끔 한 것이고, 내가 그 자리

를 충실히 그리고 성실하게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실제 그렇게 살았다. 당초 항일투쟁을 하겠다는 결단 같은 것은 없었다. 독

립운동의 최전선에 서 있을 때에도 자신이 무슨 일을 합네 하는 식의 자의식이

없었다. 말 그대로 ‘시대 상황’이 이런저런 역할을 부여했을 때 그 부름에 마다 않

고 즉각 응했을 뿐이다.

사실 그건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그는 광복을 맞기까지 27년 동안 한 결 같이 임

시정부와 함께 하면서 임정 요인들의 망명생활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었다.

명문가의 며느리, ‘단신 망명’을 결행하다

정정화(鄭靖和·1900~91)가 그 주인공이다. 3·1운동의 열기가 한풀 수그러든

1919년 10월의 어느날, 시아버지 김가진(金嘉鎭·1846~1922)과 동갑내기 남편

김의한(金毅漢·1900~1964)이 온다간다 말도 없이 사라졌다. 그로부터 며칠 뒤

신문을 보고서야 그들의 행적을 알 수 있었다. 상해로 망명했다는 것이었다. 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살림꾼 정정화대한민국의 진정한 영웅들 Ⅲ

정정화(1900~1991) 여사는 연약한 여자의 몸으로 사지를 넘나들며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였고,

한국국민당, 한국독립당, 대한애국부인회 등의 단체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그러나 직접 앞에서

나서기보다는 임시정부의 살림꾼으로 뒤에서 말없이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인연(因緣)

정정화 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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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가을 25

무 살의 젊은 부인이었던 정정화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

는 일이었다.

김가진은 누구인가? 안동김씨 경파(일명 장동 김씨)의

김상용 선생 후손(선원계)으로서 대한제국 법부대신을

지낸 대표적인 개화관료의 한 사람이었다. 1907년 고

종의 강제퇴위 뒤 모든 관직을 버리고 대한협회장 등으

로 동분서주했으나 한일합방 뒤엔 그마저 중단하고 서

울 청운동 1만여 평의 대지 위에 자리 잡은 저택 백운

장(지금 자하문터널 위의 몰몬교회 자리)에서 두문불출

했다. 그러나 그 자택마저 송사에 걸려 일본인 손에 넘

어가게 되자 사직동, 체부동의 작은 집을 전전하며 비밀

결사 조선민족대동단을 결성하고 총재가 되었다. 이 대

동단 총재 자격으로 망명한 그는 나라가 망하던 대한제

국 시기의 대신급으로서 망명해 독립운동을 한 유일한

인물이 되었다.

정정화의 판단은 아주 신속했다. 자신도 상해로 가서 시

아버지와 남편을 공양하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했다. 순

전히 스스로의 결단이었다. 문제는 상해로 가는 길이었

다. 다행히도 그의 상해행에 동의해준 친정아버지가 친

척 한 사람을 안내인으로 붙여주었다. 그렇게 해서 정

정화는 1919년 12월 상해에 도착했고, 이로써 임시정부

와 함께 하는 27년의 삶이 시작됐다. 스스로 선택한 길

이었다.

실천 속에서 ‘나라’와 ‘독립’에 눈뜨다

상해에 도착해서 눈으로 본 망명생활은 비참하기 짝이

없었다. 집세 내고 끼니 해결하는 것조차 어려웠다. 말

하자면, 먹고 사는 일 자체가 힘들었던 것이다. 현지에

서 경제생활을 하기가 쉽지 않았고, 국내외 동포들의 보

급선도 제대로 마련되어 있지 않던 때였다. 망명 두 달

여 만에 정정화는 겁도 없이 임시정부의 법무총장 신

규식을 찾아가 친정에 찾아가 돈을 얻어오겠다고 제안

을 한다.

임정 수뇌부는 논의 끝에 정정화를 국내로 밀파했다. 연

통제의 루트를 따라 1920년 3월 초 서울에 도착한 정정

화는 약 20일 동안 김가진이 써준 암호편지 등을 갖고

모금활동을 벌였다.

정정화가 상해를 떠날 때는 비밀리에 움직였지만 돌아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어머니, 곽낙원 여사(38호)-안중근 의사를 낳은 독립운동계의 대모, 조마리아 여사(39호)

자싱 피신 생활을 도운 추푸청(褚�輔成)일가�와 임시정부 가�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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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회보26

자 상해 망명사회에서 단박 화제가 됐다. 조완구 선생은 그를 일컬어 “몸 점체가

담(膽)덩어리”라고 말하기도 했다. 정정화는 1921년과 1922년에도 한 차례씩 임정

의 밀명을 받고 국내로 잠입해 모금활동을 벌였다.

키가 150cm가 될까 말까 한 그의 용기의 원천은 무엇이었을까? 용기라는 게 대체

적으로 타고나는 것이기도 하지만 어떤 계기에 결정적으로 키워지기도 하는 법이

다. 첫 번째 국내 밀파 때 만난 연통제의 신의주 거점 이세창은 정정화로 하여금

‘조국’과 ‘독립운동’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세도가나 집권자에 억눌려

지내기만 했을 뿐 조국으로부터 이렇다 할 혜택도 받지 못한 무명의 백성이 숨통

끊긴 조국을 다시 찾겠다고 위험을 무릅쓰는 모습은 그에게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때부터 정정화는 ‘이 나라의 주인은 과연 누구인가’를 되뇌며 자신이 하는 일에

새롭고도 적극적인 의미를 부여할 수 있었다.

‘임정의 며느리’로 다시 태어나다

이렇게 국내를 오가는 일을 빼놓으면 정정화는 임정의 어른들을 모시는 일에 적

극적이었다. 시아버지 김가진은 1922년 임정의 고문으로서 별세했다. 봉양할 시

아버지가 더 이상 계시지 않게 된 것이었다. 이제 이동녕·이시영·김구·조완구 등

‘홀아비 임정 어른’들은 정정화에게 모두 아버지나 다름없었다. 주로 엄항섭의 부

인 연미당과 함께 이들의 생활을 챙기는 게 일상사가 됐다. ‘김가진의 며느리’에서

‘임정의 며느리’로 다시 태어났던 것이다.

그렇게 지내던 1932년 4월의 어느날, 김구의 부탁으로 이동녕, 조완구 등과의 점

심 식사를 차리게 됐다. 식사 후 김구가 술 한 병과 신문을 사다달라고 다시 부탁

했다. 평소 술을 입에 대지도 않던 김구가 그런 부탁을 해서 의아하게 생각했다.

시내에는 호외가 돌고 있었다. 그때서야 정정화는 알 수 있었다. 청년 윤봉길이

홍구공원에서 도시락과 물병 폭탄으로 시라카와 일본군 상해파견사령관을 폭사

시킨 것이 김구의 작품이었던 것이다.

정정화의 머릿속에서 며칠 전의 일이 생각났다. 김구가 빈 도시락을 하나 가져와

서는 거기에 밥을 한번 담아보라고 한 일이 있었다. 그때는 시키는 사람도 그 이유

를 설명하지 않았고, 일을 하는 사람도 이유를 묻지 않았다. 지금 와서 보니 그게

다 윤봉길 의거 예행연습의 일환이었던 것이다. 워낙 심지가 깊고 명민했던 정정

화는 그렇게 자연스럽게 임정의 내밀한 일들에 깊숙이 들어가 있었다.

유난히 깊고도 절실했던 김구 가족과의 인연

김구와의 개인적인 인연은 훨씬 깊었다. 김의한-정정화 부부는 1922년 김가진이

독립운동가� 김의한, 정정화부부와 아들

김자동(1935, 중국 난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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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가을 27

별세한 뒤 프랑스조계지 내의 영경방 10호 집을 마침 일

가족이 상해에 도착한 김구에게 넘겼다. 그뿐인가. 김

구의 부인 최준례가 1924년 조계지 밖의 폐병원에서 세

상을 떠날 때 임종을 지킨 것도 이 부부였다. 그 뒤 김

구는 어머니 곽낙원 여사(1859~1939)까지 손자를 데리

고 한때(1925~34년) 귀국하자 정정화에게 “후동 어머

니, 나 밥 좀 해줄라우?”라며 가장 임의롭게 그의 집을

드나들었다.

이런 인연의 연장선상에서 정정화는 만주사변 발발과

윤봉길 의거 이후 김구가 다시 중국으로 모셔온 곽낙원

여사를 1935년 9월 이후 반년 가까이 남경에서 직접 모

시고 겨울을 나기도 했다. 이미 80세 가까운 고령이지

만 워낙 깔끔하고 대범한 성격이었던 곽낙원 여사는 누

구의 신세를 지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들이 정정화

에게 좀 부탁하겠다고 말하자 그때서야 마다하지 않더

라는 것이다.

그렇게 정이 든 곽 여사가 별도로 옮겨간 피난지 중경에

서 1939년 별세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정정화는 비통

한 마음에 잠겼다. ‘총과 칼을 들지 않고도 그토록 씩씩

하고 굳세었던 분’, ‘어린 창수를 백범(白凡·김구)으로 만

든 분’은 분명히 ‘민족의 어머님’이고 ‘민족의 큰 별’이었건

만 그런 분이 하나씩 자취를 감출 때마다 조국의 독립이

그만큼 멀어지는 것 같았다.

임정이 가장 어려웠던 피난 시기에 안살림을 맡다

그러나 정정화는 그런 감상에 오래 잠겨 있을 수도 없

었다. 왜냐하면 1932년 윤봉길 의거 이후 상해의 프랑

스조계지를 탈출한 임시정부가 1937년 중일전쟁 발발로

유랑생활에 접어들던 무렵부터 그는 공식적으로 임정의

안살림을 책임지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다. 1939년 4월

중경 근처의 기강에 도착할 때까지가 임정으로서는 가

장 혹독한 시련의 세월이었다.

장사, 광주 등 100여 명에 이르는 임정 요인과 그 가족들

이 옮겨 가는 곳마다 일본군의 포화가 뒤를 따랐다. 유

주라는 곳에 이르기까지 40여 일은 사람이 끄는 목선을

타고 주강(珠江)을 거슬러 지극히 원시적인 방법으로 이

동하기도 했다. 그런 상황에서 이 대식구를 먹여 살리는

것은 정정화 등의 몫이었다. 참으로 사람의 목숨이라는

것이 모질다는 생각도 했을 법 하건만 그는 불평 한 마

디 없이 그 모든 과정을 견뎌냈다.

그런 모든 과정을 거쳐 제2차 세계대전 말기의 7년 가까

운 세월을 피난지 중경과 그 인근의 기강, 토교 등지에서

지내는 사이에 정정화도 이제는 그가 처음 만나던 시절

의 김구만큼의 연배가 되었다.

김가진-김의한-정정화의 마지막 메시지는

‘민족통일’

광복 후 귀국한 김의한-정정화 부부가 이승만 정권의

자의적 통치 아래에서, 또 냉전의 비이성적 광풍 속에

서 어떤 고초를 겪었는지는 굳이 여기서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다만, 김가진, 김의한, 정정화 등 일가족

이 모든 명예와 재산을 버리고서 20세기 한국사를 온

몸으로 겪어내며 남긴 마지막 메시지 한 가지만은 되씹

어볼 만하다.

김가진의 묘소는 지금도 중국 상해의 송경령 능원에 있

고, 한국전쟁 때 납북된 김의한의 묘소는 한반도 북쪽

평양의 애국열사능에 있다. 그런가 하면 건국훈장 애족

장을 받은 정정화의 묘소는 한반도 남쪽 대전의 국립현

충원에 있다. 한국의 대표적 노블

리스 오블리주 가문인 이들 일가

족의 사후 이산(死後 離散)이 우

리에게 무언(無言)의 대성(大聲)으

로 촉구하는 것은 독립의 완성이

바로 민족통일에 있다는 것이다.

김창희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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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회보28

cloSe-up

한국미술사학계의 중요한 연구자료 될 논문 발간

정 부회장이 이번에 출간한 논총은 팔순 기념 논문으로 청자 상감을 고찰하는 내

용이 담겨있다. ‘신발견 청자 삼색’이라는 제목의 논총은 한국미술사학계의 건실

한 연구자들이 헌정한 29편의 논문과 정 부회장의 글로 묶였다. 책 한 권만으로

도 한국 미술사학계의 중요한 연구 자료가 될 법하다.

“조금 늦게 낸 감이 있지요. 사실 팔순 논문집을 낼 생각이 없었는데 주변에서

‘논문집을 만들어 달라’는 요청이 많았어요. 좀 더 일찍 썼다면 내용이 더 충실했

을 텐데 아쉬운 면이 있습니다.”

서울대 사학과 졸업 후 공군사관학교에서 국사교관을 하던 그는 1962년 당시 국

립중앙박물관 김재원 관장의 권유로 박물관 관원 생활을 시작했다. 전국 도요지

를 다니며 도자사를 편년하는 등 폭넓은 연구 활동을 했으며, 1993년 국립중앙박

물관장에 취임해 6년 동안 박물관 현대화에 기여해왔다. 정 부회장은 한국 미술

사를 통해 한국 문화를 들여다본 연구자이다. 공예와 건축, 회화를 미술사로 아

우르는 그는 모든 예술이 마음과 정신에서 나온다는 점을 강조했다.

“서양에서는 미술사가 오래됐지만 우리나라는 20세기에 들어와서야 관심을 갖게

됐죠. 당시엔 미술사 연구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연구자도 많

지 않고 연구 환경도 척박했어요. 그러던 것이 박정희 대통령 시절부터 박물관이

생기고 좋은 책들이 나오면서 성과를 내기 시작했죠.”

“백범은 문화예술 운동가입니다”정양모 부회장은 백범 김구 선생을 문화예술에 조예가 깊었던 당대의 예술인으로 바라본 인물이다.

그동안 기념사업협회의 전시의 흐름에서도 엿볼 수 있듯, 한국 문화예술계의 한 단면을 드러낸 정치가로서

백범 김구 선생의 삶을 조명해왔다. 그런 그가 얼마 전 자신의 팔순 기념 논총을 냈다. 한국박물관사의

산증인이자 백범 김구 선생을 ‘문화예술 운동가’로 부르는 정 부회장을 만났다.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정양모 부회장

정양모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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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은 문화예술의 가치를 알아본 운동가

퇴임 후 한국미술발전연구소를 세워 학문 연구에 힘쓰

고 있는 그는 백범김구기념관 설립 당시 설계와 유품 정

리 등을 맡았는데 이 일을 계기로 기념사업협회와 인연

을 맺었다. 박 부회장이 기억하는 백범 김구 선생은 위

대한 예술적 재능을 가진 운동가였다. 잘 알려진 사실이

지만 그의 부친인 위당 정인보 선생과 백범 김구 선생은

생전에 매우 돈독한 사이였다. 정 부회장은 실천하는 행

동가 이미지인 백범 김구 선생과 고뇌하는 지식인의 이

미지를 지닌 위당 정인보 선생은 이런 서로 다른 성품이

상호보완 작용을 했을 거라고 짐작했다.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과 애국심이 뜨거웠던 분이죠. 제

가 흑석동에 살던 어린 시절, 백범 김구 선생이 집에 오

시면 집안이 꽉 차고 충만한 기운이 느껴졌어요. 체구

가 장대했지만 누구보다 점잖은 분이셨어요. 백범 김구

선생이 해방 후 귀국해서 순국선열대회를 열 때 아버지

께서 추념사를 대신 써주셨습니다. 당대 명망 높은 학

자이셨던 아버지가 대필을 하셨다는 건 놀라운 일입니

다. 오로지 백범 김구 선생과의 깊은 우정 때문에 그렇

게 하셨던 거죠.”

정 부회장은 해방 이후 문화적 불모지였던 우리나라에

서 백범 김구 선생이 예술 교육에 관심을 갖고 문화를

통해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꿈꾸었던 점을 높이 평가했

다. 의식주가 풍요롭지 못한 환경에서도 문화를 강조했

던 백범 김구 선생은 누구보다 문화예술의 가치를 잘 알

았던 셈이다.

백범을 보다 가깝게 느낄 수 있는 전시 계획

백범김구기념관 개관 11주년을 맞는 올해, 정 부회장은

그동안 기획했던 백범 김구 선생 관련 전시를 되짚어본

다고 했다. 백범 김구 선생의 좌상 뒤에 처음 태극기를

걸었던 일부터 최근 백범 김구 선생 사진집이 출간된 일

까지 기억에 남는 일들이 많다고. 그러면서도 정 부회장

이 꼽는 백범 김구 선생의 최고의 유산은 백범 김구 선

생이 손수 쓰신 『백범일지』 이다.

“『백범일지』는 백범 김구 선생이 자기 손으로 직접 쓰신

글입니다. 핍박을 받고 쫓기면서 언제 죽을지 모르는 위

태로운 상황에서도 차분하게 앉아서 글을 썼다는 건 엄

청난 정신력에서 나온 거예요. 백범 김구 선생이 그렇게

까지 일지를 쓰려고 했던 이유는 자신의 행동과 살아온

날들에 대해 책임을 지겠다는 정신이 아니었을까요. 백

범 김구 선생의 진면목을 느낄 수 있어, 책을 볼수록 감

탄이 나옵니다.”

정 부회장은 “훌륭한 전시에는 사람들이 몰리기 마련”이

라며 앞으로 “백범 김구 선생의 성장기를 유품으로 보

여주는 전시를 기획하고 싶다”고 했다. 백범 김구 선생

과 관련된 사료만 조명할 것이 아니라 백범 김구 선생이

평소에 어떤 옷을 입었는지, 어떤 물건을 주로 사용했는

지 실생활에 초점을 맞추겠다는 것이다. 그는 백범 김

구 선생의 정신과 이념을 계승하기 위해서는 많은 이들

이 백범 김구 선생의 인간적 면모에 관심을 갖는 게 순

서라고 강조했다. 그의 계획대로 백범 김구 선생을 보다

가깝게 느낄 수 있는 전시를 하루빨리 볼 수 있는 날을

기대해보자.

정인보 선생에게 정영국을 소개하는

글이 적혀 있는 김구 선생 명함

정양모 부회장 팔순 기념 논문집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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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회보30

역사의 현장

이 서방과의 특별한 인연

마곡천이 태극 문양으로 휘감아 도는 마곡사는 신라 문무왕 때 자장율사가

창건한 천년 고찰이다. 마곡사는 태화산 골짜기에 마(麻)가 많이 자라서 이

름 붙여졌다고도 하고, 자장율사가 당나라에 유학하던 시절 스승인 마곡화

상을 기리는 뜻에서 지었다는 설도 있다.

백범 김구 선생은 왜 마곡사를 찾았을까. 1898년 3월 인천감리서를 탈옥한

백범 김구 선생은 하동 쌍계사, 공주 갑사, 동학사 등지로 피신생활을 하셨

다. 독립 운동에 대한 마음을 가다듬던 백범 김구 선생은 계룡산에서 이 서

방이라 불리던 한 선비를 만난다. 글방을 운영하며 한학을 공부했던 이 서방

충남 공주 마곡사백범 김구 선생이 민족번영을 기원한 사찰

충남 공주에 있는 ‘마곡사(麻谷寺)’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주석이며 독립운동의 지도자인 백범 김구 선생의 출

가사찰로 알려져 있다. 1896년 일제(日帝)의 명성황후 시해에 대한 분노로 일본군 장교를 처단한 후 인천감리

서에서 복역 중이던 백범 김구 선생은 1898년 탈옥 후, 원종(圓宗)이라는 법명으로 잠시 출가 수도하였다. 백

범 김구 선생이 스님으로 1년 여 동안 수행했던 모습은 학계에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출가 신청 후 행자

기간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스님이 될 수 있었던 점은 불교 역사에서 주목할 만한 사건이라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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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곧바로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벗이 되었다. 출가를

염두에 두었던 이 서방은 백범 김구 선생에게 마곡사에

서 함께 지내자고 권유하였다.

마곡사 김경호 기획의원은 “두 사람이 서로 대화를 나

누다보니 상대방이 학식이 있는 사람이고 의사소통이

되어 마곡사에 가기로 합의한 것으로 추측된다”고 설

명했다.

행자 생활을 거치지 않고 바로 출가

백범 김구 선생은 마곡사에서 삭발염의를 하고 부처님

의 제자가 되었다. 법명은 ‘원종(圓宗)’이었다. 『백범일지』

에는 백범 김구 선생의 ‘득도식(출가의식)’ 상황이 기록돼

있다. 사형사제 사이인 호덕삼 스님을 따라가 바위 밑 냇

가에서 상투를 잘랐다. 백범 김구 선생은 ‘머리가 섬뜩

하며 내 상투가 모래위에 뚝 떨어진다. 이미 결심한 일

이건만 머리카락과 함께 눈물이 떨어짐을 금할 수 없었

다’고 썼다.

본래 불교에서는 출가 신청을 한다고 해서 곧바로 스님

이 될 수는 없다. 스님이 되기 위해 행자로 수행 기간을

거치는데, 이때는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는다. 이런 점에

서 백범 김구 선생이 마곡사에 들어온 당일 곧바로 삭발

을 하고 주지스님이 범종을 울려 법명을 내린 것은 지극

히 예외적인 사건이었다. 마곡사 주지 원혜스님은 “당시

보경스님이 그를 비범한 인물로 보고 스님으로 인정해주

었던 것 같다”며 “<서장>을 가르치시고 선불교에서 가장

유명한 큰 스님이 단박에 그를 받아들였다는 것은 불교

역사에서도 기이한 일”이라고 설명했다.

불교에서 출가할 때 삭발하는 이유는 머리카락을 번뇌

의 표상으로 보기 때문이다. 나아가 신체 중에 가장 소

중하게 여기는 머리카락을 자른다는 것은 불교의 무소

유 정신을 나타내는 상징이기도 하다. 백범 김구 선생은

출가를 통해 자기 세계를 송두리째 바꿔야겠다고 생각

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스님이 되고 난 이후 백범 김구

선생의 생활은 평온하지 않았다.

보경스님은 그에게 “생긴 것이 미련해 높은 중은 못 되겠

다. 어서 가서 물도 긷고 나무도 쪼개거라”라고 호통을

쳤다. 1년 동안 수행을 하며 여느 중과 동일한 수행 과정

을 겪어야 했지만 백범 김구 선생은 애초부터 속세를 등

질 수 없는 사람이었다.

백범 김구 선생은 어느 날 보경스님에게 “중이 된 이상

응당 해야 할 공부를 더 하고 싶다”면서 금강산에서 경

전의 뜻을 연구하겠다고 했다. 보경스님은 “내가 벌써

추측은 하고 있었다. 어쩔 수 있느냐? 네 원이 그런 데

야”하고 이를 승낙했다. 그리고 백범 김구 선생의 여비

로 백미 열 말과 의복 등을 내어주었다.

출가한 제자를 1년 만에 보내는 것도 파격이었지만 쌀

한 가마니를 세간으로 내준 것도 놀라운 일이었다. 김경

호 기획의원은 “당시는 한 해 동안 일을 해서 세경을 받

아야 고작 쌀 넉 섬을 받던 시절”이라며 “승복만 입고 있

어도 절에서 먹고 자는 문제가 해결되는데 여비를 따로

줬다는 것은 그만큼 보경 대사가 백범을 특별하게 여겼

다는 증거”라고 말했다. 하지만 백범 김구 선생은 부친

의 뜻을 따라 승려가 되기를 포기하고 그해 9~10월경

승복을 벗는다.

속세의 일을 돌아보니 꿈만 같더라

일제가 패망한 뒤 중국에서 돌아온 백범 김구 선생은 이

듬해 마곡사를 다시 찾았다. 당시 백범 김구 선생이 대

한민국임시정부의 주석(主席)이 된 이후였다. 그가 공주

에 도착하자 11개 군의 10여만 명 동포들이 운집해 환

영회를 열었다. 백범 김구 선생이 방문한다는 소식을 전

해들은 마곡사 승려들도 공주까지 마중을 나왔다. 마

곡사 입구에서는 승려들이 도열해 백범 김구 선생을 환

영했다.

백범 김구 선생을 승려로 받아주었던 노스님들은 모두

입적한 뒤였다. 일개 승려의 몸으로 떠났다가 한 나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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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회보32

주석이 되어 돌아온 백범 김구 선생은 ‘가장 인상 깊고 신세진 곳이 마곡사’라고

회고하며 ‘50년 전에 같이 고생하던 승려가 하나도 없어 슬프다’면서 아쉬움을 표

했다. 백범 김구 선생은 48년 전 자신이 무심히 보았던 대광보전 주련에 새겨진

글귀를 다시 보게 된다.

却來觀世間 물러나 속세의 일을 돌아보니

猶如夢中事 마치 꿈속의 일만 같다

민족 번영을 기원하는 향나무와 무궁화를 심다

백범 김구 선생은 민족 번영을 기원과 함께 마곡사를 절대로 잊지 않겠다는 뜻으

로 무궁화 한 포기와 향나무 한 그루를 심고 마곡사를 떠났다. 불가에서 향나무

의 의미는 각별하다. 초, 꽃과 함께 부처님 전에 올리는 3대 공양으로써 경건하고

신령한 뜻을 품고 있다. 김경호 기획위원은 “향은 인간의 정성과 마음을 하늘에

닿게 하는 것으로 불교에서는 신성한 의미로 본다”며 “마곡사를 아끼는 백범 김

구 선생의 마음을 향나무에 담은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고 말했다.

당시 백범 김구 선생이 심었던 향나무는 마곡사 응진전 옆에서 60여 년의 세월

백범 명상길

백범 김구 선생이

민족 번영을 기원하며 심은 향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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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지키며 오롯이 서 있다. 백범당에는 해방 후 백범 김

구 선생이 동지들과 마곡사를 방문해 기념식수를 한 뒤

기념촬영을 한 사진이 걸려 있다. 완장을 찬 좌익인사들

과 넥타이를 맨 우익인사들이 함께 서 있는 사진이다.

백범당 내부은 아쉽게도 현재 보수작업이 진행돼 둘러

볼 수는 없다. 마곡사 측에서는 조만간 공주시와 협의

해 관광 해설이 있는 공간으로 대중에게 공개할 예정이

라고 한다.

백범 김구 선생은 스님이 된 이후에도 동포애를 기억하

고 나라와 민족에 대한 숭고한 철학을 간직하고 있었던

분이다. 백범의 철학은 ‘대통합’이 필요한 21세기 우리

민족의 갈 길을 제시하고 있다. 마곡사의 백범당은 문

화 유적지로서의 가치는 물론 각 종교와 사상 간의 수

준 높은 조화를 꿈꿨던 백범 김구 선생의 철학을 배울

수 있는 곳이다.

Q 백범 김구 선생이 마곡사에서 출가하셨던 것에는 어떤 의미가 있나요?

『백범일지』에는 마곡사 시절이 평이하게 기술돼 있지만 당시 전개되었던 상황은 불교의 관점

에서 보면 무척 특별한 사건이었습니다. 백범 김구 선생은 당시 마곡사에서 상당한 기대를 받

는 스님이었습니다.

Q 마곡사는 그 당시 어떤 사찰이었는지 궁금합니다.

<십승지> 기록을 보면 마곡사는 풍재, 수재 등 여덟 가�지 재앙을 피할 수 있는 지상낙원이었습

니다. 당시 동학도들이 꿈꾸던 이상향이기도 했지요. ‘십승지’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이런 곳

이 전국적으로 열 군데밖에 안 됩니다. 백범 김구 선생도 그런 점에 매료되지 않았을까 추측

을 해봅니다.

Q 백범당을 재건한 것이라고 들었습니다.

백범당이 위치했던 곳은 예전 승려들이 머물던 숙소였습니다. 보수공사를 하고 경내가� 바뀌면

서 백범 김구 선생이 머물던 곳에 기리기 위해 백범당을 지었지요. 경전 바로 앞에 있던 숙소는

당시 경건한 곳으로 행자들이 한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백범 김구 선생도 마

음을 졸이며 수행 생활을 하지 않았을까 짐작을 해봅니다.

Q 백범 김구 선생이 마곡사에서 수행했던 시절에 무슨 생각을 했을지 궁금합니다.

수행을 하면서 마음을 완전히 비울 수는 없었을 겁니다. 산책을 하면서도 불교에 가�르침에 대한 생각도 했겠지만, 민족 독립에 대한 고뇌를

피할 수가� 없었을 겁니다. 마곡사에 오기 전에는 일본군 장교를 살인할 만큼 혈기가� 왕성했지만 출가�한 뒤로 평정심을 얻었을 거라고 생각

합니다.

Q 백범 김구 선생이 승려생활을 하셨던 것이 백범 김구 선생께 어떤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하시나요?

백범 김구 선생은 정치 지도자이기 전에 한 사람의 인간이었습니다. 중이 되기까지 고뇌와 갈등이 있었고, 보통 사람과 똑같은 감정을 지니

고 있었습니다. 마곡사에서 백범 김구 선생의 흔적을 따라 ‘백범 명상길’이나 ‘삭발터’를 둘러보면서 당시 백범 김구 선생의 심정을 헤아려보

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더불어 우리 민족의 위대한 스승이 된 백범 김구 선생의 사상에 불교문화의 영향이 있었다는 것을 더 많은 사

람이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 ‘백범 명상길’이나 ‘삭발터’를 둘러보면서 백범 김구 선생의 심정을 헤아려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미 • 니 • 인 • 터 • 뷰

마 곡 사 주 지 원 혜 스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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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회보34

다시 읽는 백범일지

『백범일지』는 많은 독서감상문쓰기대회 참가자

들에게 백범 김구 선생의 나라사랑 정신과 한국

인으로서의 자긍심과 정체성을 갖게 하는데 큰

도움이 되고 있다. 백범김구기념관과 백범김구선

생기념사업협회(회장 김신)에서는 미래의 주역인

청소년들에게 올바른 역사의식과 나라사랑 정신

을 알리기 위하여 백범일지 독서감상문쓰기대회

를 앞으로도 꾸준히 지속해 나갈 것이다.

특히, 2013년 11월에는 2005년 『백범일지』독서감

상문쓰기대회가 실시된 이래 300회 째의 시상식

개최와 더불어 대회 참가자가 500,000명을 넘어

설 것으로 예상된다.

2013년 하반기 『백범일지』독서감상문쓰기대회 일정

일 정 학� 교 참가인원 소재지

9월

7(토) 장훈고등학교 710명 서울 영등포구

9(월) 영양여자고등학교 244명 경북 영양군

11(수) 주문진고등학교 200명 강원 강릉시

13(금) 영천고등학교 300명 경북 영천시

24(화) 대아고등학교 430명 경남 진주시

27(금)전주신흥고등학교 525명

전북 전주시우석고등학교 726명

30(월) 춘천여자고등학교 800명 강원 춘천시

10월

2(수) 호수돈여자고등학교 820명 대전 중구

7(월) 강릉고등학교 650명 강원 강릉시

11(금) 이일여자고등학교 600명 전북 익산시

14(월) 분당영덕여자고등학교 900명 경기 성남시

21(월) 원주여자고등학교 843명 강원 원주시

23(수) 동일여자고등학교 460명 서울 금천구

24(목) 양정고등학교 585명 부산 부산진구

28(월) 6군단 1,800명

11월

1(금) 중산고등학교 989명 서울 강남구

4(월) 다향고등학교 198명 전남 보성군

8(금) 여의도고등학교 400명 서울 영등포구

12(화) 강릉여자고등학교 680명 강원 강릉시

20(수) 야탑고등학교 320명 경기 성남시

계 21개 단체 13,180명

2013년 『백범일지』독서감상문쓰기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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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가을 35

진주동명고등학교(7월 10일) 전주기전여자고등학교(7월 12일)

삼현여자고등학교(7월 4일)

속초고등학교(6월 21일) 한림디자인고등학교(7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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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재단, 美 하와이서 『백범일지』독서감상문쓰기대회 시상 및‘창작 판소리 백범 김구’ 첫 해외 공연

『백범일지』를 통해 백범 김구 선생을 전 세계에 알리기 위해 노력

김호연 김구재단 이사장(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부회장)은 백범 김구 선생의

나라사랑, 겨레사랑 정신을 전 세계로 전파하고 있다. 김호연 김구재단 이사장은

지난 7월 20일(현지시간) 미국 하와이에서 한인 학생과 교사, 학부모 등 약 1500명

이 참석한 가운데 ‘제3회 『백범일지』 독서감상문쓰기대회’ 시상식을 개최하였다.

이날 김호연 이사장은 “이번 대회의 성과로 미국에서 백범 김구 선생의 사상에 대

한 관심과 호응이 높아지고 있고 앞으로 동남아시아, 러시아, 호주 등에서도 대회

를 이어나갈 계획”이라며 “백범일지의 세계화를 통해 전 세계에 백범 김구 선생을

알리기 위한 노력을 계속해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미주 지역을 시작으로 필리핀, 태국, 베트남, 미얀마, 말레이시아, 방글라데

시 등 동남아 6개 국가의 독후감 대회 시상식이 10월에 예정되어 있다. 이 뿐만

아니라 러시아,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아제르바이잔, 우크라이나 연합 행사

도 진행 중이다. 전 세계에 살고 있는 한국인들의 마음을 『백범일지』를 매개로 하

나로 묶어보겠다는 희망이다.

『백범일지』의 세계화와 동시에 김구재단의 또 다른 핵심 사업은 ‘김구 포럼’이다.

긴박하게 돌아가는 한반도 정세와 관련한 폭넓은 주제를 갖고 세계의 전문가들과

다양한 의견을 교환하겠다는 취지로 진행 중이다. 2005년에는 하버드대, 2010년

에는 베이징대에서 개최했으며, 이 밖에도 미국 내 유수 대학과 다양한 교류 협

력사업을 진행해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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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가을 37

백범상, 뉴잉글랜드 한국학교 김정완양 수상

이번 대회에는 미국 전역에 있는 28개교 한인 학생들이 응모했으며 최고상인 백범상에는 뉴잉글랜드 한국학교

김정완 양의 ‘백범 김구 선생님’이 선정됐다. 특히 힐튼 하와이언 빌리지에서는 ‘창작 판소리 백범 김구’(임진택

명창·이규호 고수)의 첫 해외 공연이 열려 의미를 더했다.

창작판소리 ‘백범 김구’에서 임진택 명창의 열창하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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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회보38

흰 옷에 검은 뿔테 안경을 쓰고 순한 듯하면서도 호

랑이 상 얼굴을 한 독립운동가. 한창 10만원권

도안 얘기로 들썩거리던 당시에도 내가 백범 김구 선생에

대해 알고 있는 수준은 이 정도에 그쳤었다. 이 후에 공부

를 이어나가면서 자연스럽게 백범 김구 선생에 관한 단편

적 지식을 조금씩 쌓아 왔지만 나에게 이 정보들을 제공

한 그 무미건조한 텍스트들에서는 어떻게 백범 김구 선생

이 고액 화폐의 도안으로 낙점 받을 수 있었는지 선뜻 가

슴으로 느끼진 못했었다. 그러면서도 여태껏 이 책을 읽

을 생각을 안 해왔다는 건 부끄럽지만 나의 탐구심 부족

탓으로 보는 게 타당하겠다. 그러나 다행히도 비록 떠먹

여주는 식으로나마 이렇게 기회가 생겼고 이때가 아니면

언제 이 책을 읽어보겠나 싶어 시험 기간이라는 시기적

특수성을 촉진제 삼아 후다닥 책을 펼쳐들었다. 머리말을

읽다 알게 된 사실은 『백범일지』의 ‘일지’가 日誌(매일 매일

기록한 일기)가 아니라 逸志(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를 기

록)라는 것이었다. 따라서 하루 단위로 기록된 일기 형식

이 아니었고 큰 주제별로 글이 묶이어 상·하권 백범의 유

년기부터 광복 직후까지의 행보가 담겨 있었다. 백범 김

구 선생이 눈에 띄는 행보를 보이기 시작하던 때는 그가

거의 내 나이 즈음이었을 때다. 열여덟 살에 동학에 입도

한 백범 김구 선생은 1년 만에 동학 접주 첩지를 받아 같

은 해에 일어난 동학 농민 운동에서 황해도 지역 봉기의

선봉에 나서 동학군을 이끄는 역할을 했다고 한다. 내가

백범 김구 선생이라면 당장 내년에 선봉장이 되어 군인

들을 이끌고 전장을 누빌 수 있을 것인가 하고 자연히 가

정을 해보게 되었다. 어떤 느낌일지 확실하게 알 순 없어

도 어지간하면 호들갑 떨 만도 한데 백범 김구 선생의 그

날에 대한 기록에서는 전혀 그런 류의 심경을 찾아볼 수

없고 오직 덤덤함뿐이었다. 사실 이 일에서 백범 김구 선

생은 어떤 직책을 맡았어도 괘념치 않았을 것 같았다. 모

두가 같은 마음으로 도모하는데 위치가 무슨 상관이겠냐

고, 책에는 이런 말이 적혀 있지 않지만 접주 시절의 그에

게서 배운 하나였다. 동학 농민 운동 이후 머지않은 때에

일어난 치하포 사건에선 백범 김구 선생의 무서운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저 왜놈이 국모를 시해한 미우라가 아

닐까’ 하는 판단이 들자 곧 크게 호령하며 달려들어서 일

본군 육군중위 쓰치다를 처단하던 장면은 너무도 강렬해

서 그 장면을 떠올릴 때면 내가 본 건 텍스트뿐인데도 마

치 내가 그 현장에 있는 것 같았다. 내 생각엔 아무리 애

국심에서라도 이 정도면 너무 맹목적이지 않은가 싶을 정

도로 이 당시의 백범 김구 선생은 위험하게 느껴졌었다.

그런 일촉즉발의 백범 김구 선생이 그 사건으로 해주옥

에 투옥되었다가 인천 감리서로 이송되게 되는데 그곳에

서 첫 신문을 받던 장면에서 이상한 느낌을 받게 되었다.

신문장에서 조금도 겁먹지 않은 모습으로 오히려 자기가

더 큰소리를 내어 관리들의 얼굴을 홍당무로 만들고 일본

인 와타나베가 꽁무니를 빼게 만들었으며 신문장 바깥의

모든 조선인들이 백범 김구 선생을 응원하는 그런 장면이

었는데 기분이 좋으면서도 어딘가가 개운하지 않은 느낌

이 있었다. 아무리 일본인이라도 사람을 죽인 백범 김구

선생이 옹호를 받고 있는 이 상황. 왜 그럴까 곰곰이 생각

다시 읽는 백범일지 II

변영인진주 동명고 2학년

『백범일지』 독서감상문쓰기대회 백범상 수상삭

진정한 애국심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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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가을 39

해보다 내가 감히 가볍게 여긴 전제 하나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만국공법 어

디에 통상 화친 조약을 맺은 나라의 국모를 시해하라는 구절이 있더냐?” 백범 김구

선생이 법정에서 와타나베를 향해 한 호통 중 한 마디다. ‘국모 시해 사건’. 모든 조

선인들이 일본의 상식을 넘어선 만행에 치를 떨었다. 신문장에서 백범 김구 선생의

몰아붙임에 관리들은 일제히 얼굴이 홍당무 빛이 된 것도, 조선인이라면 모두 백범

김구 선생을 열렬히 응원한 것도 국모의 말도 안 되는 죽음에 대한 슬픔과 분노에

서 온 것이었다. 그런데 나는 그 사건을 이해하는 데 결코 빼놓을 수 없는 그 전제를

쏙 빼놓고 읽은 것이었다. ‘국모 시해’ 네 글자가 똑똑히 적혀 있는 것을 똑똑히 보았

지만 난 그것을 보았다 할 수 없었다. 그 네 글자를 보고도 전혀 내 마음에 동요가

일지 않았다. 부끄럽게도 그 사건은 이미 나에게 국사책에 나오는 수많은 사건 중의

하나에 불과했던 것이었다. 오늘날 애국심과 역사의식이 큰 문제다. 먼 곳도 아니고

바로 나에게서 이런 문제를 발견하게 되다보니 백번 실감하게 되는 현실이다. 나라

를 사랑해야 역사를 알게 되는 것 같고 역사를 알아야 나라를 사랑하게 되는 것 같

다. 며칠 전 역사 수업에서 비슷하게 들은 내용이기도 한데 이제야 확실하게 느끼게

되었다. ‘역사를 안다’는 것도 몇 년에 어떤 일이 일어났단 것만 안다고 아는 게 아니

란 것을 깨닫게 되었다. 모의고사 한국사 점수가 잘 나온다고 역사를 잘 아는 것도

아니었다. 혹 한국사를 수능 필수 과목으로 한다고 해도 점수를 잘 받기 위해 영혼

없이 공부한다면 그저 지적 허영을 위한 도구 그 이상의 무엇을 더 바랄 수 없을 것

으로만 보인다. 물론 애국심에서 역사 공부를 시작한다면 반드시 역사를 제대로 알

게 될 것이다. 그런데 그 애국심이라는 것도 오늘날 의미가 퇴색된 것 같다. 외국에

진출한 가수의 유튜브 조회수가 탑에 올랐다고 그것을 애국이라 하는 수준에 이르

렀다면 그건 조상님들을 뵙기가 민망한 일이라고 본다.

김구의 호 백범(白凡)은 ‘우리나라가 완전한 독립국이 되려면 가장 낮은 계층의 사람

들인 백정과 범부들도 모두 깨어나 적어도 자신(김구)과 같은 애국심을 가져야 한다’

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흔히들 백범을 ‘하얀 호랑이’로 알고 있다. 나는

백범이 그 뜻이 아니란 것은 알고 있었지만 ‘하얀 호랑이’라는 뜻도 그에게 참 잘 어

울린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나중에 글을 쓸 때 그에게 이 뜻의 호를 선물로 드려

야겠다 하고 설레발을 치고 있다가 본래의 의미를 알고 나서는 내 계획을 접었다. 본

인 정도의 애국심을 하한선으로 둔 것이 어째 전혀 겸손에서 한 말로는 보이지 않았

다. 지금 우리의 애국심은 어떠한가? 많아야 한 달에 한두 번 국기에 대해 경례를 할

때에도 뒤의 태양에 눈이 부시다고 태극기를 똑바로 쳐다보지 못 하는 우리를 백범

김구 선생이 보신다면 자랑스러운 한국의 국민이구나, 라고 말씀하실까? 책장을 다

넘긴 뒤엔, 물음과 부끄러운 대답만이 남았다.

미 • 니 • 인 • 터 • 뷰

백범상 수 상 한 변영인 학�생

Q 백범상을 받은 소감은?

얼떨떨했습니다. 지금도 그렇고. 처음

수상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백범상

이 부끄럽지 않게 좀 더 잘 썼어야했

는데 하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습

니다.

Q 백범 자서전 『백범일지』를 읽고 변

영인 학�생이 영향을 받은 것이 있다

면?

역사를 배운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

그리고는 내 나라를 위해 산다는 것

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한국사를 대학을 가�는 수단으로서만

여기는 게 아니라 내 의지로 배우게

되었습니다.

Q 『백범일지』의 최고의 장점은 무엇

이라고 생각하는가?

두 아들에게 조곤조곤 들려주는 듯한

진솔하고 담담한 문체와 그럼에도 희

석되지 않은 채 담겨 있는 백범 김구

선생의 나라사랑 정신과 독립의지가�

읽는 이에게 커다란 울림과 메시지를

남긴다는 것입니다.

Q 변영인 학�생에게 백범이란?

경교장에서 백범 김구 선생의 마지막

옷을 보고 아직 남은 민족의 과제를

떠올렸습니다. 백방으로 뛰어다니시

고도 끝내 민족의 대화합을 보지 못

하시고 돌아가�셨지만 정신은 여전히

남은 채 우리를 화합으로 나아가�게 만

드는 페이스메이커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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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회보40

뜨거운 햇살이 내리쬐는 여름날, 여의도의 광복회관에

는 햇살보다 더 뜨거운 열기가 가득했다. 광복회관에 모

인 스물일곱명의 대학생들은 곧 만나게 될 여정이 기대

되는 듯 했다. 이들은 ‘2013년 독립유공자 후손 국외독

립운동유적지 탐방단’으로 광복회에서 시행하는 국외독

립운동사적지탐방에 참가하는 독립유공자 후손들이었

다. 광복회에서는 매년 독립유공자후손을 대상으로 애

국선열들이 일제에 항거하며, 독립투쟁을 펼쳤던 국외사

적지를 탐방함으로써 고난의 역사를 되새기고, 선열들

의 숭고한 희생정신과 나라사랑 정신을 북돋우는 계기

를 마련하기 위하여 국외독립운동사적지탐방을 실시하

고 있다. 이번 탐방은 2013년 7월 5일(금)부터 10일(수)까

지 5박 6일 동안, 상하이(上海) 임시정부 청사와 홍커우

(虹口) 공원, 만국공묘, 자싱(嘉興) 김구 선생 및 임정요

인 피난처, 하이옌(海鹽) 재청별장 김구 선생 피난처, 항

저우(抗州) 청태제2여사 및 호변촌 임시정부청사, 충칭

(重慶) 임시정부 청사와 광복군 총사령부 터 등을 방문

하는 일정으로 진행되었다. 백범김구기념관에서는 관리

부 김호기 차장과 기념사업부 이홍구 학예사가 이들의

뜻 깊은 여정에 함께 하였다.

풍찬노숙 독립을 위해 헌신한 그들의 노력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1919년 상하이에 만들어진 이래

충칭에서 광복을 맞이하기까지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은

빼앗긴 우리나라를 되찾기 위한 백범 김구 선생을 비롯

한 여러 독립운동가들의 노력 덕분이었다. 백범 김구 선

생과 임정 요인들은 일제에 의해 목숨이 위태로운 긴박

한 상황에서도 오로지 독립을 향한 의지를 굽히지 않았

다. 훙커우(虹口)공원은 지금 루쉰(魯迅)공원이 되었지

만 윤봉길 의거 당시 일본인들과 일본군 주요 수뇌부가

특별한 하루

대 한 민 국 임 시 정 부 와 함 께 한 6 일 간 의 여 정

백범 김구 선생과 독립 운동가들의

나라사랑, 겨레사랑 정신을 느끼다

광복군 총사령부가� 있던 곳 상해 임시정부 청사 내 김구 선생 동상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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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가을 41

모였던 자리로서, 그 넓은 모습을 상상하니 윤봉길 의

사의 냉정하고도 침착했던 당시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

었다. 한 편, 자싱의 김구 선생과 임정요인 피난처, 그리

고 하이옌의 재청별서에서는 ‘풍찬노숙(風餐露宿: 바람

을 먹고 이슬에 잠잔다는 뜻으로, 객지에서 많은 고생을

겪음을 이르는 말)’이란 말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다.

일제의 추적을 따돌리고 피신 생활을 했던 백범과 독립

운동가들, 특히 백범은 당시 돈으로 60만원의 현상금이

걸리면서도 임시정부를 살리기 위해 변장과 변성명을 하

고, 변변한 피난처가 없어 선상생활을 마다하지 않았으

니 그 의지는 가히 바람과 이슬도 방해하지 못하는 것이

었다. 항저우-전장-창사-광저우-류저우-충칭으로 이

어지는 총 8년간의 이동시기의 어려움 속에서도 임시정

부를 지키기 위해, 그리고 우리나라의 독립을 이루기 위

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던 백범 김구 선생과 임정 요인

들의 마음이 그대로 탐방단에게 전달되고 있었다.

임시정부 유적을 통해 한-중 관계도 깨달아

상하이, 항저우, 충칭을 비롯하여 중국 내에는 총 다섯

곳에 임시정부 청사가 복원되어 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를 향한 중국인들의 시각이 호의적이라는 것을 대변해

주고 있는 것 같았다.

백범이 자싱과 하이옌으로 피신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상해법과대학장이자 중국 국민당의 실권자였던 추푸청

(褚�輔成)과 그 가족의 도움 때문이었다. 또한 항저우와

충칭 임시정부 청사 역시 중국 국민당의 도움으로 자리

를 얻을 수 있었다. 특히 지금 남아있는 충칭 임시정부

청사의 규모는 다른 청사보다 확실히 큰 모습이었다. 이

건물을 보며 장제스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얼마나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지 느껴졌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19년부터 있었지만 실질적으로

중국과의 관계가 돈독해진 것은 이봉창, 윤봉길 의사 의

거 이후였다. 만보산사건과 만주사변으로 멀어졌던 우리

와 중국의 관계를 전환시켜준 것이 이봉창, 윤봉길 의

사 의거였던 것이다.

이봉창, 윤봉길 의사 의거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중

국 국민당 장제스 정부와의 관계가 급속도로 가까워졌

고, 백범과 임정 요인들은 중국인들의 도움으로 일제를

추격을 따돌릴 수 있었다. 그 뒤로 난징, 장사, 광저우,

류저우를 거쳐 충칭에서 광복을 맞이하기까지 중국 국

민당 정부의 도움은 계속되었다. 바로 항일(抗日)이라는

공통된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과거의 관계는 지금도 계속되는 듯 했다. 중국 땅

에서 중국 사람의 공감 없이 우리 역사의 흔적이 남아있

는 곳을 복원하고, 관리하기란 여간 쉽지 않은 일이다.

게다가 지금 중국은 국민당이 아닌 공산당이 다스리는

정부가 들어서 있다. 하지만 지금의 중국 정부도 1992년

수교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를 비롯한 여러 흔적

들을 복원하고 또 관리하고 있다. 일제에 대항했다는 과

거의 기억이 지금도 중국인들에게 남아있었다.

동질감 속에서 찾은 희망

이번 여정에서 5박 6일 동안 함께했던 독립유공자 후손

들은 일상생활에서는 전혀 만날 기회가 없는 평범한 대

학생들이었다. 하지만,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숨결이 닿

을 듯한 유적지를 하나 둘 찾아가면서 독립운동가의 후

손이라는 동질감을 느끼고, 서로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

이게 되었다.

이들은 각자 다른 곳에서 다른 전공 공부를 하며, 가지

고 있는 생각조차 많이 달랐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독

립유공자의 후손이라는 자부심이 느껴졌다. 독립운동

의 흔적들을 돌아보며 그들은 후손으로서 이 나라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또 이 나라를 위한 나의 역할

이 무엇인가를 깨닫고, 그것을 실행하기 위한 다짐을 아

끼지 않는 모습을 보며, 이들의 선친이 꿈꾸었던 조국의

미래에 대한 희망을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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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김구기념관에서는 7월 26일과 27일 양일간, 2013 년 상반기 『백범일지』 독

서감상문쓰기대회 수상자를 대상으로 ‘2013 청소년 백범문화캠프’를 실시하

였다. 참가한 학생들은 다양한 활동을 통해 『백범일지』의 주인공인 백범 김구

선생을 만나보고 그의 삶과 사상을 다시 한 번 깨닫는 한 편, 수상자 간의 친

교를 나누는 시간도 마련하였다.

백범 김구 선생의 삶의 흔적을 돌아보다

이번 캠프는 우리 기념관과 효창원 애국선열묘역, 안중근의사기념관, 서대문

형무소, 경교장을 돌아보는 일정으로 진행되었다. 참가 학생들은 여러 유적들

을 돌아보며 『백범일지』에서 읽었던 감동을 직접 체험할 수 있었다.

첫째 날, 캠프 참가 학생들은 우리 기념관과 효창원 애국선열묘역, 안중근

의사기념관과 백범광장을 돌아보았다. 우리 기념관에서는 『백범일지』를 읽었

던 기억을 바탕으로 백범 김구 선생의 전 생애를 다시 한 번 돌이켜보는 시

간을 가졌다. 백범 김구 선생과 여러 독립운동가들의 유해가 모셔져 있는 효

창원 애국선열묘역에서는 그들의 독립을 위한 의지를 상기하며 잠시 숙연해

줌인, 현장 속으로 I

미래의 주역 청 소년! 백범 안 에 서 하 나가 되다

2013 청소년 백범문화캠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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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가을 43

지기도 하였다. 안중근의사기념관에서는 백범의 청년기

를 함께했던 안중근 의사 집안의 이야기를 서로 나누었

으며, 기념관 옆에 있는 백범광장에 있는 김구 선생 동

상도 보았다.

둘째 날은 서대문형무소와 경교장을 방문하였다. 두 곳

은 모두 백범 김구 선생의 삶의 흔적이 묻어있는 장소

다. 백범 김구 선생이 신민회 활동 중 ‘안악사건’과 ‘105인

사건’으로 인해 수감되었던 서대문형무소는 1911년 수감

당시의 모습보다 더 규모가 커졌지만 『백범일지』에 표현

된 당시 수감 실태를 직접적으로 체감할 수 있어 참가

학생들이 백범 김구 선생의 경험을 오롯이 느낄 수 있었

다. 경교장 역시 마찬가지였다. 시종일관 밝았던 학생들

은 안두희의 흉탄을 맞고 서거하셨던 2층 집무실에 들

어서자 숙연해졌다.

각지에서 모인 학생들, 백범으로 하나가 되다

‘2013 청소년 백범문화캠프’에는 11개 학교에서 34명의 학

생들이 참여하였다. 서울을 비롯해 강원, 충청, 경상, 전

라도 등 전국의 다양한 지역에서 참여하다 보니 처음에

는 서먹했다. 그러나 모둠별로 각자를 소개하고, 별명과

모둠명을 정하는 활동을 하며 서로를 알아가기 시작했

으며, 도시락을 함께 먹으며 점점 웃음꽃이 피어났다.

탐방지 안에서는 설명해주는 내용을 서로가 공유하며,

서로의 관심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하였다.

저녁 활동시간에 진행된 친교활동에서 참가 학생들은

모둠 눈치게임, 손가락 수 맞추기를 통해 모둠의 단합을

도모하고, ‘백범은 OOOO이다.’라는 문장 만들기와 그

림으로 표현하는 시간을 통해 선생에 대한 이야기를 함

께 나누었다. 참가한 모든 학생들이 ‘백범’이란 이름 아

래 서로를 이어가는 뜻 깊은 시간도 만들었다.

백범으로 맺은 인연이 계속되길 바란다

참가 학생들은 이번 캠프를 돌아보며 “백범 김구 선생의

나라사랑, 겨레사랑 정신과 그 속에 녹여져 있는 그만의

사상을 마음속에 항상 간직하면서 살 것이다” 고 소감을

전하며 “이번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이 인

연이 영원토록 이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우리 기념관은 처음으로 청소년 대상 1박 2일 캠프를 진

행하면서 백범 김구 선생을 사랑하는 많은 학생들과 인

연을 맺었다는 데 큰 의의를 두고 있다. 이번 캠프 운영

을 통해 미진한 점을 보완하며 앞으로도 백범 김구 선생

을 사랑하는 청소년들을 더욱 많이 만나고자 한다.

백범광장 서대문형무소역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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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회보44

가족과 함께 떠나는 역사탐방바른 역사의식을 심어줄 수 있는 기회를 제공

줌인, 현장 속으로 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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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가을 45

백범 김구 선생과 우리 역사를

바로 알고 경험할 수 있는 소중한 시간

백범김구기념관에서는 8월 14일 여름방학 프

로그램 중 하나로 ‘가족과 함께 떠나는 역사탐

방’을 실시했다. 초등학교 고학년 어린이와 가족

이 함께 참여한 ‘가족과 함께 떠나는 역사탐방’

은 백범김구기념관, 효창원을 시작으로 이봉

창의사 집터를 확인하고, 매헌윤봉길기념관

을 거쳐 경교장 관람 후 마무리 됐다. 이번 역

사탐방은 우리나라의 자주독립을 위해 노력한 독립운동가들의

업적을 비롯해 백범 김구 선생과 우리 역사를 바로 알고 경험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초등학교 5학년인 강윤 어린이와 함께 참여한 송경숙 씨는 “내

일이 광복절이라 그 의미를 제대로 알려주고 싶어 참여했다”고

참여 동기를 밝히면서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위

인들의 삶과 우리 역사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어 가슴이 뭉클하

다”고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특히 역사에 관심이 많은 강윤 어

린이는 “단순히 교과서 위주의 역사 교육이 아니라 전문 학예사

의 자세한 설명과 함께 생생한 재미를 느낄 수 있었다”며 “이런

답사에 자주 참여하고 싶다”고 말했다. 휴가를 대신해 온가족이

역사탐방에 참여한 서정욱 씨는 “우리나라의 독립과정과 광복절

에 대해 정확히 알고 싶어 참여했는데 도움이 됐다”며 “짜임새

있는 프로그램에 만족스럽다”고 말했다. 가족과 함께하는 역사

탐방 프로그램은 아이들뿐만 아니라 부모에게도 바른 역사의식

을 심어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일석이조의 효과를 내

고 있다. 또한 이해하기 쉽게 구성한 어린이용, 상세한 설명과 자

녀와 함께 대화할 수 있는 학부모용 답사지를 구분해 배포함으

로써 답사과정의 중요한 흐름을 파악하고 학습효과를 높일 수

있도록 하였다.

2013년 백범김구기념관 여름방학 교육 ‘가족과 함께 떠나는 역사

탐방’에 참여한 학부모와 어린이들은 “짜임새 있고 알찬 프로그

램에 만족한다”고 전하면서 “겨울방학에도 다시 참여하고싶다”

고 입을 모았다.

이봉창의사의 집터를 확인하고 있는 참가�자들

매헌윤봉길기념관 내의 윤봉길 의사 동상

백범 김구 선생의 빈소로도 사용되었던 경교장의 귀빈식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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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회보46

통일교육 가이드

힘들어진 통일 교육의 환경

통일 수업에서 처음 만나는 학생들에게 “언제 통일이나 북한에 대해 생각하게 되

는가?” 라는 질문을 하면 대개 인터넷, 뉴스, 영화 등 대중 매체에서 북한이나 통

일 문제를 다룰 때라고 말한다. 그럴 때 북한이나 통일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게

되느냐고 물어보면 많은 학생들은 북한에 대한 거부감이나 통일에 대한 부정적

생각을 갖게 된다고 말한다. 즉 통일 교육의 사회·문화적 환경은 다분히 선정적

이고 부정적인 경우가 많다. 더욱이 최근 몇 년 동안 남북한 관계가 단절되고 대

결 국면이 형성됨으로써 이러한 경향은 더 심화되었다.

학교 통일 교육의 환경은 어떨까? 통일 교육에 가장 많은 수업 시수를 할애하는

도덕과의 경우, 올해 1학년부터 중학교 도덕 교과서가 3권에서 2권(일반·심화 수

준)으로 축소되고, 고등학교 도덕은 필수 교과에서 선택 과목이 되어 유명무실

해졌다. 이에 따라 중학교 도덕 교과서 통일 단원의 가장 큰 변화는 중단원 3개

에서 2개로 줄어들면서 ‘북한 이해’가 독립된 중단원에서 통일의 필요성이라는 중

단원 속의 하나의 소단원으로 축소되었다는 점이다. 도덕에 있어서 중단원은 사

실상 하나의 주제를 균형 있게 학습하기 위한 최소 단위이다. 소단원 이름도 ‘보

편적 가치의 관점에서 본 북한 주민의 생활’이다. 단순하게 표현한다면 1~2 차시

의 수업을 통해서 통일의 필요성이라는 맥락에서 북한 사회를 보편적 가치의 관

점에서 이해하라는 주문이다.

실사구시의 개방적 통일 교육

통일 교육을 실천하는 도덕 교사의 한 사람으로서 볼 때 청소년들의 바람직한 통

일 의식 함양에 가장 큰 걸림돌은 북한 사회, 북한 사람들에 대한 맹목적이고 부

정적인 선입견이다. 올해 1학기 말 쯤에 1학년 학생들과 영화 ‘어떤 나라’(MBC 방

송 편집)를 보고 난 후 모둠 토의 수업을 하였다. 집단 체조를 준비하는 평양의

두 여학생 현선과 성연의 학교 및 가정생활을 보여주는 영화였다. 다음은 모둠

토의 과정에서 ‘영화를 보고 난 후 평소에 북한에 대해 생각했던 것과 다른 점은

무엇인가?’란 질문에 대한 학생들의 답변이다.

통일의 필요성 인식하기

심근석경북 상모중 교사

꾸준한 학습과 경험 과정을 통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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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가을 47

“북한 학생들은 훈련만 받는 줄 알았는데, 영어를 배우

는 것을 보니 신기했다.”

“북한 사람들은 경직되고 차가운 줄만 알았는데, 우리처

럼 정도 나눈다.”

북한의 어두운 면을 덮어두고 좋은 점만 보자는 것이 아

니다. 학생들이 실사구시의 관점에서 북한에 대한 균형

잡힌 시선을 가질 때 통일 교육이 바람직하게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보편적 가치의 관점에서 한 개의 소단

원으로 북한을 학습하는 것은 이미 부정적 선입견으로

닫혀 있는 많은 청소년들의 마음을 열고 제대로 된 북

한 이해 교육이 이루어지게 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북

한 이해의 바람직한 방향은 학생들에게 북한 사회와 사

람들에 대한 다양한 모습을 제시하고 학생들로 하여금

토의·토론하도록 하는 것이다.

많은 경우 청소년들이 통일의 필요성을 느끼도록 하기

위해서는 통일을 청소년 자신의 문제로 여기도록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고들 하지만, 분단 현실에 익숙해져 있는

청소년들에게 그게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통일

의 필요성 인식은 어느 한 순간의 깨달음에 의해서라기

보다는 꾸준한 학습과 경험의 과정을 통해 자연스럽게

자리 잡는 마음 상태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학생들의 편

견을 걷어내는 일이 통일의 필요성을 느끼게 하는데 있

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나는 믿는다.

중학교 통일 단원에서 바람직한 구성도 찾아볼 수 있

다. 통일 중단원 ‘바람직한 통일의 모습’의 첫 소단원이

‘평화적 교류와 협력의 필요성’인 점이다. 이 소단원의 전

개를 보면 ‘남북한 교류와 협력의 필요성 ⇨ 남북한 교

류와 협력의 역사와 분야별 현황 ⇨ 남북한 교류와 협

력의 바람직한 방향’의 흐름을 대부분의 도덕 교과서가

따르고 있다. 여기에는 통일 교육의 중요한 관점을 담고

있다. 그 하나는 ‘과정으로서의 통일’, 다른 하나는 ‘북한

을 동반자로서 관용하고 포용하기’이다. 이 두 가지 관점

이 그 다음 2개의 소단원에서 다루는 ‘북한이탈 주민과

더불어 살기’, ‘통일 한국의 미래상 학습’으로 이어지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당위적으로 결론을 제시하기보

다는 해결해야 할 문제 형식으로 제시하고 역시 학생들

이 바람직한 관점을 토대로 스스로 결론을 탐색해 나가

도록 하는 것이 좋다.

21세기의 통일 교육을 위하여

세계화, 다문화 시대에도 민족공동체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통일 교육이어야 한다. 우리나라 다문화 교육에

서는 북한 이탈 주민들을 우리와 특수한 관계가 있다는

모호한 입장을 취하면서도 다문화 소수 집단의 하나로

분류하고 있다. 이런 다문화 교육을 받는 학생들이 북한

을 다시 회복해야 할 민족공동체의 동반자가 아니라 그

냥 외국과 같은 나라로 보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 북한

이탈 주민에 대한 학습은 통일 교육의 관점으로 일원화

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통일 교육의 장에서는 자유로운 견해가 개진될 수 있어

야 한다. 교육은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하지만 ‘정치적 중

립’이란 정치적인 견해를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정치적 견해들을 허용하고 존중한다는 뜻이다.

독일의 정치교육의 기준인 보이텔스바흐 협약이 모범적

인 사례이다. 협약의 내용은 ①강압, 교화, 주입 금지 ②

균형·대립적 논쟁 확보 ③정치적 상황 및 자신의 이해관

계를 고려한 결론 도출로 이루어져 있다.

통일 교육은 정치권력으로부터 독립된 주체에 의하여

오로지 교육적 관점에서 통일 교육의 교육과정이 구성

되고 교육의 과정이 조절되도록 해야 한다.

2013년 분단 속 통일의 모습은 답답한 상황 속에서도 통

일의 희망을 놓지 않고 통일 교육에 매진하고 있는 청소

년들과 그들의 작은 울타리가 되어 주는 통일 교육 교사

와 일꾼들이 희망이다. 낙심할 필요가 없다. 우리의 희

망이 모여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통일의 강물은 도도

히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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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회보48

백범김구기념관 n e w s

국무총리 방문 -

8월 17일 정홍원 국무총리는 광복절을 맞아 백범 김구 선생의

아드님이신 김신 백범기념사업협회장을 만나기 위해 백범김구기

념관을 방문하였다. 이번 만남에서 정 총리는 순국선열을 비롯한

애국지사들의 고귀한 희생과 애국혼을 되새기면서 국정 운영에

매진하겠다고 밝혔다. 또한,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번영은 수많은

애국지사의 희생과 헌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며 국가�유공자들에

대한 예우에 소홀함이 없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러시아 독립국가연합 한글학�교 협의회 방문-

7월 27일 러시아 독립국가�연합 한글학교 협의회에서 대학생들과

함께 기념관을 방문하였다. 이들은 인덕대학교에서 한국어 및 한

국문화 연수 차 방문하여 학습 중인 학생들로, 전시관을 둘러보

고 묘소를 참배하였다. 러시아 독립국가�연합 한글학교 협의회에

서는 백범일지 독후감 대회를 실시할 예정이며, 이를 통해 학생들

에게 백범 김구 선생의 삶과 사상을 알릴 수 있길 기대한다.

진주보훈지청/서경방송 방문-

진주보훈지청/ 서경방송에서 8월 17일 기념관을 방문하였다. 가�

족을 중심으로 한 답사 활동으로, 국가�와 민족을 위해 공헌하신

분들의 고귀한 정신을 계승, 발전시키기 위해 기념관을 방문, 전시

관람과 효창원 애국선열묘역 참배를 통해 백범 김구 선생과 독립

운동가�들에 대해 보고, 느끼고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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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가을 49

각급 학�교 및 단체 방문-

유치원, 초, 중, 고 및 기타 여러 단체에서 우리 기념관을 방문하여

백범 김구 선생의 삶과 그 숨결을 느끼는 시간을 가�졌다.

서울 은로초, 서연중, 난우중, 와부중, 영등포여고, 북악중, 연서

중, 동성중, 배화여중, 신관중, 부천문화원, 등 각급 학교 및 기관

에서 기념관을 방문하여 전시관람 및 효창원 애국선열묘역을 참

배하였고, 토평마을어린이집, 신사중, 세화여중 등이 참여하여 기

념관의 교육프로그램 ‘대한민국의 상징 태극기, ‘연극으로 만나

는 백범 김구 선생’, ‘백범신문 만들기’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경

험하였다. 기념관에 방문한 학생들은 학예사의 안내에 따라 전시

관람 또는 교육에 참여하고, 효창원 애국선열묘역을 돌아보며 백

범 김구 선생의 지고지순했던 나라사랑, 겨레사랑의 참 의미를

되새기고 돌아갔다.

여름방학� 교육 ‘찾아라! 우리역사’ -

우리 기념관에서는 2013년 7월 30일부터 8월 16일까지 매주 화

~금요일에 걸쳐 백범김구기념관 여름방학 교육 ‘찾아라! 우리역

사’를 진행하였다. 여름방학을 맞이하여 어린이들에게 백범 김구

선생의 생애와 사상을 알기 쉽게 전하고, 역사에 대한 올바른 인

식을 심어주기 위해 마련한 이번 교육은 ‘나의 소원’, ‘백범김구기

념관 인물사전’, ‘통일 대한민국’, ‘함께 생각해 보아요, 북한의 어린

이’, ‘연극으로 만나는 백범김구선생’ 등 저학년(1~2학년), 고학년

(3~4), 5학년 이상~학부모로 나누어 진행하였다.

우리 기념관에서는, ‘찾아라! 우리역사’에 3회 이상 참여한 어린이

에게는 수료증과 소정의 상품을 수여하여 프로그램에 참가�하였

다는 보람을 느낄 수 있도록 하였고, 참여 횟수에 따라 모양이 다

른 배지를 제공하여 흥미 및 성취감을 느낄 수 있도록 하였다.

광복절 기념 – 도슨트와 함께 떠나는 역사여행 및 나의 사랑 태극기

-

8월 15일 광복절을 맞이하여 전시해설 ‘도슨트와 함께 떠나는 역사여행’과 기념관 교육

‘나의 사랑 태극기’를 진행하였다. 가�족 관람객 대상으로 진행된 이번 교육은 오전, 우리나라의

광복을 위해 힘쓰신 백범 김구 선생과 많은 독립운동가�의 활동에 대해 알아보고 오후에는

대한민국의 상징인 태극기의 의미와 사용 방법을 알아보는 ‘나의 사랑 태극기’를 통하여

태극기에 대해 이해하고 태극기 모양을 이용한 가�족 티셔츠를 만들어 보는 시간을 마련하였다.

학생만의 교육이 아닌 가�족이 함께 할 수 있는 활동으로, 서로 이야기 나누며 광복절과

태극기의 의미를 살펴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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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회보50

<백범회보>는 독자여러분과 함께 소통하고자 합니다.

독자 퀴즈에 참여하시면 추첨을 통해 문화상품권을 드립니다.

Quiz 통!

퀴즈! 다른 부분 찾기

다른 부분 5개를 찾아주세요.

독자 퀴즈의 정답을 보내주시는 분들께는 추첨을 통하여 문화상품권을 드립니다. (10월 20일까지 마감)

보내실 곳_ 서울특별시 용산구 효창동 255 백범김구기념관 담당자 앞

참여 마당

퀴즈! 백범김구기념관

1 중국, 영국, 미국 등과 함께 2차 대전에 연합국의 일환으로 참전하여 일제를 상대로 독립전쟁을 전개하고자 1940년 9월 중국

중경에서 창설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군대의 명칭은 무엇일까요?

2 ‘답설시(踏雪詩)’는 백범 김구 선생이 즐겨 휘호하셨던 시로, ‘절대 부끄럽지 않은 길을 가�겠다’는 신념이 담겨 있습니다. 이 시는 그

동안 서산대사의 시로 알려져 있었는데, 최근 한양대 국문과 정민 교수는 이 시가� 조선후기 000 시인의 시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이 시인의 이름은 누구일까요?

① 이양연 ② 서정주 ③ 이양헌 ④ 김시습

자르

는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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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관 교육·문화 프로그램 문의전화_ 02)799-3432~3 | 백범김구기념관은 서울시교육청에서 지정한 현장체험학습기관입니다.

기념관의 교육은 유아, 어린이, 청소년, 일반을 대상으로 하며 교육 내용 및 예약에 관한

자세한 사항은 기념관 홈페이지(www.kimkoomuseum.org)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백범 김구 선생 관련 자료·휘호·도서를 찾습니다.

백범 김구 선생 관련 자료·휘호·도서를 소장하고 계신 분은 우리 협회로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연락처(자료 담당자) 02)799-3432

2013년 하반기 주말가족나들이

• 일시_ 매주 토/일 오후 2시

• 정원_ 20~30명, 2시간

• 예약방법_ 매달 둘째주 화요일 11시, 홈페이지 선착순 예약

월 교육명

9월14일(토) 백범신문만들기

28일(토) 나의 사랑 태극기

10월 6일(일) 백범신문만들기

12일(토) 백범의 길, 나의 길

11월

3일(일) 백범신문만들기

9일(토) 가�족과 함께 떠나는 역사탐방

16일(토) 대한민국임시정부

30일(토) 통일 대한민국 2

12월14일(토)

꼬마 큐레이터21일(토)

제3회 백범김구기념관 작은 음악회

• 일시_ 2013년 10월 5일(토) 16시, 대회의실

• 대상_ 초등학생 이상 가�족 및 일반

• 예약_ 2013년 9월 23일(월) 10시부터

• 공연 내용 및 예약 방법은 기념관 홈페이지에서 확인바랍니다.

※ 공연은 기념관 사정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 교육은 기념관 사정에 의해 달라질 수 있으며, 교육이 없는 토/

일에는 ‘도슨트와 함께 떠나는 역사여행’이 진행됩니다.

• 11월 19일(토) 진행되는 ‘가�족과 함께 떠나는 역사탐방’은 유료로

진행됩니다.

※ 예약 시 유의 사항

1) 참가�자 10명 이하일 경우 주말교육은 폐강됩니다.

2) 원활한 진행을 위해 예약 취소를 원하실 경우 최소 이틀 전

연락주시고, 당일 취소하실 경우 향후 6개월간 기념관 교육 참여가�

제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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